산아래, 반야산은 무수한 ‘산아래’를 거느리고 있다. 요소요처 각양각색인데, 그 중 불타는 봄을 맞는 곳이 있다. 김홍신문학관 앞마당에서 진입하는 등산로다. 영산홍이 만개할 때 중앙 계단은 모세의 홍해 기적처럼 영산홍 바다의 물결을 가른다. 이 언덕바지는 시유지고, 시민정원이다. 영산홍 밭 아래로는 너른 돌이 몇 있다. 사진 찍거나 음료 나누며 대화하기 딱 좋은 돌상, 돌의자다.
|
▲ 문학관 뒤란에서부터 펼쳐지는 시민정원. 작은 연못에 이어 바위의자와 영산홍군락이 조화를 이룬다. ©
|
지난 봄, 이 돌의자 앞으로 무궁화 7그루가 식재되었다. 국내 최대의 무궁화농장인 ‘장호농장(대표 전병열)’에서 기증한 무궁화 삼천리와 광명이다. 상대적으로 꽃이 귀한 여름, 이 무궁화는 영산홍에 이어 붉은꽃 등불을 밝혀주었다. 좀더 아래 내려오면 넉넉하게 감싸주는 나무가 둘 있다. 둘다 키높이 반송인데, 하나는 조경석 바로 뒤에서 커다란 일산(日傘)을 펼쳐들고 있다.
|
▲ 겨울이면 고드롬 쇼 연출하는 문학관 뒤란의 연못 물레방아 ©
|
시내에서 문학관으로 들어오는 이들은 둘로 갈린다. 우향우하여 건양대 운동장으로 내려가는 운동파, 좌향좌하여 반야산 오르는 걷기파. 그 분기점에서 사람 구경하는 좌우 두 나무는 사방으로 펼쳐진 반송(盤松)이다. “제 키높이에 맞춘 겁니다.” 작은 거인 김홍신 작가의 유머가 터지는 좌측 소나무는, 남상원 회장이 반년에 걸쳐 수소문하여 찾아낸 명품 찌들목이다. 찌들목은 금수저 환경에서 자란 미인송에 비할 때 찌들듯 고생하며 자랐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위로 크지 못한 대신 껍질이 두껍고 줄기가 굵다. 그 덕분에 예술적 가치가 높다.
우측 소나무는 2023년 박영희 동국대 교수와 정기태 조경건설 대표가 문학관에 기증한 반송이다. 그 밑에는 편하게 걸터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이다. 임금 행차때 썼던 홍양산이나 의장(儀仗) 부럽잖은 그늘밑 포토존이다. 이 나무 밑에서 박영희 교수는 김홍신 작가와 이어온 인연의 시간들을 풀어놓는다. 그 실타래를 직접화법으로 들어본다.
나와 김홍신 문학관, 그리고 소나무
|
▲ 박영희 교수와 부인 선우혜경(MBC 10대가수, 대표곡 ‘당신 때문에’) ©
|
김홍신 작가님과의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동국대학교 첨단강의실에서 시작되었다. 작가님의 강의를 듣고 싶었다. 그분이 초밀리언 셀러 『인간시장』의 작가여서가 아니라, 월간 에세이에 실린 고 최인호 소설가와의 ‘공항에서의 만남’ — 그 인간적이고 서정적인 이야기 때문이었다.
강의를 정식으로 부탁하기 위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바쁜 일정, 쉽게 연결되지 않았다. 나는 기다리는 대신 계속 걸었다. 10번, 20번, 30번… 그리고 마침내 47번째 전화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게, 왜 이렇게 전화를 많이 했어?” 이어서 들려온 한마디 — “그래, 내가 가서 강의를 하지.” 그 순간의 따뜻함은 앞으로의 인연의 시간을 단숨에 밝히는 빛과 같았다. 한 번의 악수였지만 따뜻함이 남았고, 그날 이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호형호제하는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작가님의 글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그분의 ‘품격과 사람됨’에 더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5년 전부터는 자연스럽게 정읍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에 논산의 ‘김홍신문학관’을 자주 찾기 시작했다. 문학관은 작가의 역사와 시간이 머무는 곳이지만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의 숨결이 모이는 공간이었다.
|
▲ 인연의 상징으로, 작가의 숨결과 나무의 결이 만난 자리에 심은 반송 ©
|
집필관 입구에는 왼쪽에 듬직한 소나무가 하나 서 있었지만 오른쪽은 텅 빈 채로 남아, 마치 누군가를 조용히 기다리는 듯한 풍경이었다. 그 비어 있는 자리가 이상하게 내 마음에 오래 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정읍 친구의 농원에서 오랫동안 키워온 찌들목을 보게 되었다. 세월을 견딘 나무의 굴곡과 결이 유난히 아름다웠고, 문학관의 왼쪽 소나무와 한 쌍을 이루기에 충분했다. 나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그 소나무를 구입해 집필관 오른편에 심으며 작가님과 이어진 인연의 상징을 그 자리에 세웠다. 심은 날, 작가님께서는 나무를 한참 바라보시더니 “잘 왔다, 잘 왔어” 하고 환하게 웃으셨다. 그 미소는 지금도 문학관을 지날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다.
지금도 문학관을 찾으면 오른쪽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찌들목 소나무를 먼저 바라본다. 그 나무는 바람에도 사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인연의 기념비 같은 존재다. “문학은 결국 사람의 향기에서 자란다”고 믿는 나에게 그 소나무는 말없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김홍신 문학관은 작가의 문학적 유산을 보존하고, 그의 작품 세계를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 사유와 창작의 숨을 고르는 공간이다. 집필관, 전시실, 정원 등 문학적 분위기가 깃든 구성은 방문객에게 글의 기원을 상기시키며 누구나 마음의 속도를 늦추게 하는 고요한 감동을 준다. 이 글이 문학관을 찾는 누군가에게 작가 김홍신의 품격과 향기, 인간적 깊이와 따뜻함, 그리고 그 문학적 세계를 조금이나마 전해주길 바란다.
* 글쓴이 박영희는 동국대 CEO인문학최고위과정 지도교수다. 인문학 아티스트로서 지난 20년간 ‘CEO 토요편지’를 꾸준히 써오고 있다.
- 이진영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