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文武) 양반도시 논산은 무가 강세인 분위기다. 연무대훈련소와 국방산업 이미지가 강렬해서다. 문(文)의 약진도 못지않다. 우선 2025문학제가 다채롭다. 19일에는 문화원 주최로 ‘논산문학제’가 열렸다. 10월에도 줄을 잇는다. 연산대추축제 열리는 17일에는 총 네 차례 진행되는 ‘시민인문콘서트’의 마지막 순서로 김홍신작가 북콘서트가 규모있게 열릴 예정이다. 23~25일은 돈암서원에서 열리는 ‘사계인문학대축제’도 문학제를 품고 있다.
지난 13일 주말, 강경 소금문학관은 하루 종일 북적였다. 점심때 시작된 문학제가 저녁 루프탑콘서트까지 이어져서다. 올해가 10회째인데, 이번 프로그램도 지난 회의 골격과 비슷했다. 문학을 예술로 승화한 시노래와 창작극~ 낭독낭송~ 작가4인의 북토크~ 독자와의 대화, 대략 이런 순서와 콘텐츠들이다.
장시간에도 끄떡없는 문학제의 마력
이 흐름도는 크레센도이다. 대개는 너댓 시간의 긴 진행에 자리 뜨는 일이 속출도 하련만, 소금문학관에서는 기우다. 객석에서 가만가만 자리를 지키던 주인공이 행사 중간이나 독자와의 시간에 불쑥 던지는 말들이 예전 30도짜리 동해백주 카피마냥 “사나이 가슴에 불을 당”겨주곤 해서다.
그런 긍정의 불꽃은 말미로 갈수록 가속화되지만, 이번 문학제에서는 성화(性火)가 초반에 터져나왔다. 낭독 낭송의 시간에서다. 박범신 팬클럽 와사등과 소사모에서 이선경, 홍신애 낭독가 둘이 나와 작가의 작품을 낭독하였다. 주제는 “상처와 결핍 회복 그리고 긴 시간 속 사랑” 처음에는 소설 ‘소금’과 ‘은교’가 울려퍼졌다. 마지막으로 준비한 시 ‘영원’ 낭송 후 “작가는 말합니다”는 멘트로 맺었다.
흐르고 머무니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 영혼도 그러하다.
흐르면서 머물고 머물면서 흐르니,
작가로서 나의 삶은 아직도 분별없이 현재 진행형이다.
날마다 고통스럽고 날마다 황홀하다.
그 고통이 도져서였을까, 객석에서 박수소리가 그치기 무섭게 박 작가가 일어섰다. “내 문장 그대로가 아니다. 작가가 마침표 하나, 조사 토씨 하나 쓸 때는 고민하여 확정하는데, 이걸 변경 훼손하는 일은 문화행사에서 특히 주의해야 된다”고 경고장을 날리자 객석도 갈린다. 공감한표도 있고, ‘구시렁구시렁 여든’이거니 하는 반응도....
[백일장] 이제는 너희들이다
같은 낭독인데도 학생들에게는 후한 점수가 주어졌다. 10회문학제가 지금까지와 확연 다른 게 있다면 청소년들의 대거 참여다. 올해 처음으로 ‘와초 박범신 청소년백일장’을 시작했는데, 그 공모주제는 ‘소금’이었다.
시상식은 장려상부터 시작되었다. 우수상, 최우수상, 대상은 각각 2명씩이었다. 대상수상자 김하진은 두 편을 낭독했다. <바다가 내게 남긴 소금의 이름>은 “3.5% 더 빛나게 된 해변의 별 가루”로 “나의 혈관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는/ 물결이 내게 남긴 흉터, 소금(消擒)”이다. 수상식에서 노작가는 지갑을 크게 열었다. “이들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기를 기대해요. 장학금 주자 했더니만 예산 없다고 해서 이번에는 제 주머니돈 털었습니다. 이 바통 어어줄 분, 여기 보니까 많으네요~” 특유의 너털웃음에 객석의 3.5% 눈빛이 빛나는 듯했다, 사인이 대상자지만 공인으로 참석한 박양훈 교육장, 황명선 국회의원, 조용훈 시의회의장 포함하여.
네 명이 참여하는 북토크의 주제는 <그래도, 여전히, 글을 쓸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노작가 근황이었다. “나이 드니까 아내밖에 없는 거 같아요. 치매초기 진단을 받았고, 이제는 내가 직접 간호할 요량으로 국가고시를 치뤘죠. 60점 받으면 합격하는 요양보호사 시험을 94점에 패쓰했답니다!” 이 발표에 객석에서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북토크] 힘든 시간 관통하게 해주는 글, 글쓰기
북토크 진행 박아르마 건양대 교수는 김이정, 조용호 두 작가를 무대로 모셨다. 김이정 소설가는 자신을 생계형 작가라고 소개하면서 “인생의 위기나 가장 힘든 순간에 글을 가장 치열하게 썼다”고 술회한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글을 쓸 것이다’는 주제의 연장선상이다. 이경혜 작가 대신 나오게 됐다는 조용호 작가는 소설가로서뿐 아니라 엄혹했던 시절 노래패, 노래운동가로 소개되었다. “최근 남성 작가 작품의 퇴조와 여성 작가들의 약진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조 작가는 남성 작가와 독자의 분발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북토크 질문 중에는 대중성과 작품성 사이의 갈등도 있었다. 독자와의 대화 시간 손을 든 어느 웹소설가의 엇비슷한 질문에 박 작가는 “할 수 있다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라”고 조언한다.
[문학~예술] 글은 노래가 되고, 연극이 되고
기실 이 둘은, 자웅동체일지도 모른다. 논산문학제는 시극이 단골레파토리라면, 박범신문학제는 창작극이다. “문학, 예술이 되다” 이름으로 올려지는 창작극에서, 두 남녀 배우(문장원·최성혜)가 객석 통로를 따라 따로따로 하산하였다. 극의 시놉시스는 박범신 시집 『구시렁구시렁 일흔』. 여전히 남아 있는 욕망을 토로하면서 죽음조차 담담 받아들이는 인간군상을 그린 작품인데, 두 배우의 강렬 눈빛과 가창력은 천정을 뚫고 루프탑에 미리 도달해 있을 성싶다.
전달면에서 연극보다 직효일 거 같은 노래는, 박범신문학제에서는 늘 시노래다. 연무대산인 김산은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도 수상한 시인이다. 그가 높은 의자에 걸터앉아 기타 치며 노래한 ‘너의 손을’과 ‘나무들’은 본인 작사 작곡이다. 김산 곡, 박범신 작사 ‘흰소가 끄는 수레’는 2년 전의 문학제에서 선보였던 이삼십 분에 걸쳐 진행되었던 1인모노극이 싱어송라이터의 노래로 환생한 느낌이다.
박범신 팬클럽인 와사등 회장 정진채 역시 세 곡을 펼쳐놓았다. 정규앨범을 6집까지 출시한 그는 시노래 가수이며, 박범신 시가 주종을 이룬다. 박범신 시 ‘주름’, ‘봄의 예감이 넘치는 어느 날’ 그리고 ‘길위에서 죽은 W씨에게(부엔까미노)’가 연속 흘러나왔다.
[이야기꽃] 명주, 명주바람
문학제 중간에 박 작가는 ‘명주바람’이라는 단어 하나를 선물하였다. “당신의 남은 매일 매일/ 빨래 널기 좋은 날이면 좋겠다/ 그럼 참 좋겠다” ‘구시렁구시렁 일흔’에 수록되어 있는 이 문장은 시비로 새겨져, 소금문학관 정원 오가는 이들을 맞는다. 객석의 정적을 깨기 위하여 주최측이 준비한 이벤트는 풍선! 풍선을 불고 거기에 자기가 쓰고 싶은 말을 쓰는 이벤트, 미리 짠 바 없지만 동일한 문장 몇이 겹친다. “날마다 황홀하다”, “빨래 널기 좋은 날”.... 주최측에서 마련한 케이터링과 사인회까지로 해서 공식 행사가 끝난 때는 저녁때.
옥녀봉 석양을 뒤로하며 이어진 뒷풀이는 인근 식당에서였다. 소사모와 와사등 주최로 마련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이재성 소사모 회장(백제병원장)은 명주바람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작가님이 명주실처럼 오래, 건강하게 살아주십사’는 축원과 함께 ‘병이 깨끗해졌다’는 선언도 하였다. 정진채 가수도 질세라 노작가의 장수를 바라며 박범신 시 본인곡인 ‘명주바람~’으로 반주를 넣었다. 이심전심이련가 노작가는 “이렇게 해주는 여러분을 보니 내가 더 오래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다” 화답했는데, 영원한 청년작가도 피해갈 수 없는 절대고독의 독백으로 들렸다.
박범신문학투어코스, 확장일로
저녁 식후 이동한 카페 ‘소금이야기’에서도 이야기꽃은 봄꽃이다. 이대로라면 작품세계는 물론 작가 자신만의 이야기로도 천일야화 붐이다.
확장선 타고 밤바다 나가보면, 강경은 박범신 작가의 궤적 지천이다. 작가가 자신의 문학적 자궁이라 일컫는 강경천 금강 둔치마당의 갈대밭, 연무 살던 때 강경 오가던 뚝방길, 강경산 옥녀봉 지척의 소금집, 돌산전망대 초입 강사모가 세운 박범신문학비..... 작가 자신이 가장 아낀다는 『더러운 책상』의 무대들(16세에 ‘통학기차를 타러 새벽에 채운산 중턱 고아원 철문 앞을 지나는 모습, 강경읍 채산동 장공장의 긴외벽, 녹슨 함석대문’)
강경 살짝 벗어나 건양대 박범신문학콘텐츠연구소, 탑정호 집필실, 수변주차장 말뚝에 써있는 박범신 문장문장들... 그간 정기적으로 해오던 탑정호 소풍길 산책도 좋지만, 내년 11회 문학제 때나 어느 날 하루 날 잡아서 직접 둘러보고 싶은 박범신문학투어코스들이다.
참, 빼먹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문학제 관객석에는 백일장 수상자들 외에도 대전 제일고 학생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 문학동아리를 십수년째 이끌어오고 있는 권영선 국어교사는 이날 일정을 오전은 김홍신문학관, 오후는 강경산소금문학관으로 잡았다. 책 구입에 저자 사인까지 받아든 아이들 표정에 지친 기색이라곤 없었다, 하루 종일 어느 선진의 자욱을 좇았기에....
-이진영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