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9일(토) 논산시와 연무읍 번영회, 논산시문화원은 연무 행복마을아파트 잔디광장에서 ’연무읍 승격 60주년 기념 축하 음악회‘를 개최했다. 궂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백성현 논산시장, 서원 논산시의회 의장, 김종민 국회의원, 이용환 육군훈련소장 등 지역의 주요 내빈 등이 참석해 ‘읍 승격 60주년’이라는 역사적 순간의 의미를 다졌다.
특히, 백성현 논산시장은 “연무읍은 명실공히 호국의 가치를 오롯이 품고 있는 자랑스런 논산의 상징”이라며, “연무읍의 역사 속에서 함께 호흡한 주민 여러분들의 희로애락을 되돌아보며, 지역 전체가 더욱 빛나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이날 행사는 주민자치프로그램과 추억의 7080공연 및 인기가수들의 무대로 이어졌다. ‘읍 승격 60주년’이라는 의미를 읍민들과 함께 화합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문화예술 공연을 마련했다”는 것이 주최측의 설명이다.
대한민국 건국 뒤에는 우리 군(軍)이 있고, 그 군 뒤에는 바로 연무대 육군훈련소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 ‘곡성’의 “뭣이 중헌디?”라는 대사가 곱씹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본지는 ‘연무읍 승격 60주년’을 맞아 연무의 역사적 의미를 짚어보며 향후 연무의 방향성을 제시해 본다.
역사를 잊으면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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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11.1. 논산 육군훈련소 창설
- 1953.6.18. 논산포로수용소 반공포로 탈출
- 1960년대, 논산훈련소 국보 141호, 146호 출토
- 연무, 태권도의 발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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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수난사 와중에 병사들의 기초 군사 훈련을 위해 세운 신병교육부대가 바로 연무대, 논산훈련소다. 육군훈련소의 역사는 문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역사였다. 사진은 1950년대 육군훈련소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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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산 육군훈련소 창설
1951년 11월 1일을 기해 충남 논산군 구자곡면 일대의 부지에 육군 제2훈련소를 창설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고 부대의 이름은 연무대(練武臺)로 정해졌다. 이와 동시에 21교육연대와 교관단이 창설되었으며, 11월 5일에는 김종갑 준장이 초대 소장으로 취임했다.
곧이어 22교육연대와 23교육연대도 창설됨으로써 본격적인 훈련소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44만여 평의 부지에 병영시설 100여 동을 건설하는 대공사에는 1202건설공병단과 203건설공병대대, 그리고 미군의 26야전공병대대가 투입되었다.
- 이내용은 육군훈련소 창설 60주년 기념 ‘이보다 아름다운 젊음은 없다’ 책자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6.25전쟁과 연무대 창설]
6.25전쟁이 절정에 달했던 1951년 가을, 빈약한 무기도 문제였지만, 압도적인 수로 육박해 내려오는 북한군과 중공군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우리 군의 병력 보충이 시급한 과제였다.
당시 우리 군의 신병교육을 담당하던 제1훈련소는 제주도에 위치해 있었다. 비교적 전선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안정적으로 신병교육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병력 손실이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전투 상황을 감당하기에는 제주도는 너무 좁고 너무 멀었다.
이에 제2훈련소를 내륙에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김종갑 준장이 제2훈련소 건설의 책임을 맡고 초대 소장으로 내정되었다.
김종갑 장군은 전략적 기지로 전북 군산항을 염두에 두고 그 일원을 답사했다. 전주 부근을 시작으로 전북 일대와 충남의 남부 일대를 두루 둘러본 뒤, 현재의 연무대에 터를 잡았다.
많은 병사들이 동시에 훈련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교육장을 확보할 수 있을뿐더러 옛 백제군이 나당 연합군과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황산벌’이라는 역사성도 띠고 있는 곳이다.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세(地勢) 역시 정예 강병 육성이라는 훈련소의 창설 목적과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이 일대는 군대와 군인을 의미하는 무(武)자를 쓴 무동(武洞)으로 불리고 있었다.
▲ 초대 소장 김종갑 준장(왼쪽에서 세 번째)과 참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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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며 건설하고 건설하며 싸운다]
1952년 2월 2일, 각 교장에서 최초의 신병교육훈련이 일제히 시작되었다. 당시 막사도 지어지지 않아 교관이든 훈련병이든 임시 천막에서 생활하며 군사 훈련과 훈련소 건설 임무를 동시에 수행했다.
“싸우며 건설하고 건설하며 싸운다”는 구호가 창설기 연무대에서는 문자 그대로 압축적으로 시행되었다.
1952년 5월 1일, 25교육연대가 창설되었고, 이어 5월 3일 정식으로 훈련소 개소식이 열렸다. 이어서 26, 28, 29, 27, 30교육연대가 차례로 창설되어 1953년에 이르자 총 9개 교육연대에서 연간 14만여 명의 신병을 양성할 수 있는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마침내 1953년 5월 3일,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훈련소 개소 1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입영열차와 야간호송열차는 사라졌지만 육군훈련소는 지난 70여 년 동안 변화에 변화를 거듭해왔다.
하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는 것도 있다. 신병교육이라는 근본적인 목표가 바뀌지 않았고, 1년 365일 쉬는 날 없이 훈련병들의 함성과 군가가 우렁차게 부대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는 점도 달라지지 않았다.
■ 논산포로수용소 반공포로 탈출
6.25휴전협정(1953.7.27.)이 있기 한 달여 전인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전국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반공포로 2만7천여 명을 미국과 사전 협의 없이 전격 석방(탈출)시켜 국제사회를 놀라게 하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 포로들을 이북으로 보낼 수 없었고, 휴전 회담이 한국정부 의사와 관계없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자 극단적인 행동을 취한 것이다.
지금은 상전벽해 한 연무 행복마을아파트 일원에는 1952년부터 1953년까지 ‘논산 제6포로수용소’가 위치해 있었다. 그 후 116육군병원으로 잠시 사용되다가 군인아파트가 들어섰다.
[논산 제6포로수용소 반공포로 탈출, 다큐 3일 ]
육군본부의 <한국전쟁과 반공포로> 내용에 의하면 ‘논산 제6포로수용소’는 3개의 수용소로 구분되어 총 11,038명의 반공포로가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 중 8,024명이 탈출에 성공하였고, 나머지는 탈출 중 부상 2명, 사망 2명, 체포 336명, 미탈출 2,674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 첫 날, 1953.6.16.
6월 16일 서울에서 급파된 황동준 소령은 논산지구 헌병대장 정수남 소령, 제5경비연대 제3대대장 홍순정 중령, 제55헌병중대장 박준남 대위와 비밀리에 회합을 갖는다. 이들은 야간 정찰 결과 수용소 주변에는 미군 초소가 없고 정문에만 한‧미군 보초가 합동 근무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 밖의 수용소 내부의 사정과 지형을 관찰한 후 다음 행동계획을 숙의하였다.
# 둘째 날, 1953.6.17.
홍순정 중령은 순찰로 가장하고 수용소 정문을 통과했다.
수용소 막사 안으로 들어간 그는 간부급 포로 6명을 소집하여 '포로 석방 계획과 탈출에 필요한 내용'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날 3개의 수용소 막사 중 제1수용소는 미군의 경비가 심해 연락을 취하지 못한 결과 2천6백여 명의 포로가 탈출하지 못하는 결과가 발생했다.
작전명령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8일 새벽 2시 반공포로 전원 석방, 탈출 신호는 플래쉬로 3번 깜박거림, 탈출구는 북쪽 울타리, 탈출 방향은 공주 부여 방면
- 각 중대장 및 참모들은 이 명령에 절대 복종하여 이번 거사를 성공시킬 것
- 각 소대장은 포로들의 탈출을 최대로 돕고, 미군이 발포할 경우 탈출 포로를 엄호하기 위해 위협적인 대공 사격을 할 것, 이 사항을 보초근무자에게 정확히 알릴것
- 제10, 11, 12중대장은 각각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수용소 북쪽에서 플래쉬로 세번 깜박이는 신호와 함께 신속히 철조망을 끊고 포로들의 탈출 통로를 만들어 줄 것
- 통신대장은 수용소 북쪽의 전선을 끊을 것
- 보급관은 철조망 절단기를 각 중대에 10개씩 지급
- 정보관은 대대장과 행동을 같이 하고 부대대장과 작전관은 미 고문관의 연락이 있을 때 제9중대를 지휘하여 포로들의 체포를 기피하고 도피시키는 데 최선을 다함
- 탈출 포로는 논산 방면으로 유도하되 차후의 일은 경찰이 담당
# 셋째 날, 1953.6.18.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가운데 새벽 2시가 되었고, 드디어 플래쉬 신호가 3번 깜박였다. 이와 동시에 외곽 전등은 일제히 꺼지고 탈출을 대기하고 있던 포로들은 물밀듯이 밀려 나와 잘라진 철조망을 통과했다.
이렇게 해서 제2, 제3 수용소 막사의 포로들이 거의 빠져나갈 무렵에야 제1수용소 막사에 탈출 개시 지령이 도달했다. 그래서 제1수용소 막사에서는 내의 바람으로 빠져나온 포로들이 대부분이고 그나마 3분의 2는 탈출을 시도하지도 못했다. 일단 수용소를 빠져나온 포로들은 경찰과 민간인의 안내로 옷을 바꿔 입고 재빨리 민가에 잠입했다.
당시 포로수용소장인 에이크 미군 대령은 “탈출한 포로들이 불과 30분 내에 논산읍으로 사라져 버렸다”며, “수용소에서 8㎞나 떨어진 논산읍까지 순식간에 가버린 것에 대해 미군 경비병들이 놀라움을 금지 못하고 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실제로 탈출 포로들은 논산읍으로 가지 않고 경찰의 안내로 인근 민가에 은신하고 있었다.
▲ 관촉사 화장실 입구에 있는 이승만대통령 추모비 ©놀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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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촉사 이승만 대통령 추모비]
1953년 논산은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농경사회였다. 석방된 8천여 명의 포로가 거리를 활보한다면 이건 또 하나의 커다란 사회적 문제일 것이다. 그리하여 경찰과 지역사회의 협조를 통해 일손이 부족하고 여유가 있는 집에 한 명씩 배치하여 농사일을 돕게 하였다. 일종의 현대판 머슴이었다.
그때 그들에게 지급되었던 새경은 “1년에 쌀 4~5가마였다”고 한다. 당시 구자곡면 삼전리 한 농가에서는 반공포로를 데릴사위로 맞아드린 집도 있다고 한다.
그때 석방되었던 반공 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추모비를 충령탑 인근 현 관촉사 경내에 설치하였다. 그 후 충령탑은 지금의 등화동으로 이전하였고 추모비만 썰렁하게 관촉사 경내 화장실 뒤편에 남아 있다.
6.25전쟁의 아픔과 분단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연무의 이야기’는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는 여간해서 톺아볼 수 없는 시간 여행이다.
■ 논산훈련소에서 수습한 희대의 보물
1960년대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참호를 파던 병사들이 의문의 물체들을 발견했다. 흙과 녹이 잔뜩 묻은 고색창연한 ‘청동기 세트’ 드디어 세상에 나오는 순간이었다. “싸우며 건설하고 건설하며 싸운다”는 당시의 구호에서 보듯이 훈련병들의 작업은 일상이었다.
이 청동기 세트는 기원전 3~2세기(청동기와 초기 철기시대)에 제작되어 제정일치의 지도자가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귀중한 보물이었다. 군인들은 이 청동기 세트를 중간상인에게 팔아넘겼다.
중간상인은 청동기세트를 2개로 나눠 한 개는 숭실대 박물관에 나머지 세트는 수집가 김모씨를 거쳐 호암(리움)미술관으로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청동기 세트는 막연하게 강원도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숭실대 박물관 소장 ‘정문경’은 1971년 국보 141호, 호암미술관 소장 ‘청동방울 일괄유물’은 1973년 국보 146호로 지정되었다.
이 두 개의 보물이 같은 출토지 출신이라는 사실을 모르다가, 이 청동기 세트를 사고팔았던 중간상인이 고 한병삼 국립중앙박물관장에게 “국보 141호와 146호는 논산 육군훈련소 군인들이 수습한 세트 유물”이라는 고해성사로 여러 가지 의문점이 풀리게 되었다.
▲ 국보 제141호 정문경(다뉴세문경)는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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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7대 불가사의, ‘정문경’]
국보 제141호 ‘정문경’은 ‘다뉴세문경’으로 알려진 청동거울이다. 즉, 고리가 많은 가는 무늬 거울이라는 의미이다. ‘다뉴세문경’이라는 용어는 일본에서 붙인 이름으로 왜색풍이라 할 수 있어, 국보 141호의 정식 명칭은 ‘정문경’이다.
국보 141호 정문경은 처음부터 국보경(국보거울)으로 일컬어질 만큼 국보 중 국보로 통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정문경의 반복된 동심원의 무늬가 0.3㎜로 ‘청동기시대의 나노기술’이라 할 수 있다. 현대 기술에서도 새기기 힘든 극초정밀의 1만3천개가 넘는 선과 원을 새겨넣은 그 시대의 장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두 번째 이유는 “0.3㎜의 극초정밀 예술품을 어떻게 주조했느냐?”는 의문점이다. 이것이 바로 정문경을 두고 첨단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불가사의라고 혀를 내둘렀던 이유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유혜선 보존과학부장은 “국보 141호 정문경은 고대 청동거울 제작을 위한 황금비율을 그대로 반영했다”면서, “청동기 기술이 최고 정점에 달할 때 제작된 유일무이한 작품이다”라고 극찬했다.
기원전 3~2세기 국보 141호 청동거울을 만든 장인은 쉽게 깨지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황금비율로 알려진 구리와 주석 비율을 67:33에 맞추려고 분투했다. 덕분에 색상과 반사율 면에서 최상의 조건을 갖춘 극초정밀의 예술품이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 0.3㎜ ~ 0.55㎜ 간격으로 그은 1만3천여 개의 선과 동심원을 천신만고 끝에 그려놓은 것은 그 장인의 집중력과 인내력이 가히 신의 경지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 장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차! 하는 순간 깨질 수 있었다는 것을.
그런데 이 정문경이 과거에 “실제로 사용했을까?”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이전까지는 미사용품, 즉 부장용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이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끈을 매달아 사용한 마찰 흔적이 두 고리에서 확인되었다. 이는 한 사람이 정문경을 하나의 끈으로 두 개의 고리에 관통해서 매달아 사용했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2300여 년 전 제정일치 시대, 하늘과 땅과 인간의 소통을 독점하는 강력한 지도자가 은백색 정문경을 가슴에 달고 양손에는 팔두령과 간두령, 쌍두령 같은 청동방울을 흔들며 지도자의 위엄을 마음껏 펼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도자는 연무 육군훈련소 어딘가에서 “아직도 잠들어 있다”는 역사적 가설을 그냥 웃어넘길 이야기만은 아니다
■ 연무, 태권도의 발원지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충청도 은진현과 전라도 여산군 경계인 작지마을(현 연무)에서 매년 7월 15일 백중날 충청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모여 수박희로 승부를 겨루었다”고 한다. 수박희는 현재 태권도의 모태이다.
<연무가 태권도의 발상지>라는 내용에 대해서는 현재 연구용역 중이라 자세한 내용은 언급할 수 없음을 양해바란다.
- 전영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