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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초대석] 성광원 전 법제처장 “죽기살기로 하다보니 장관도 해보고, 남은 여생도 순리대로~”
기사입력  2021/10/11 [17:19]   놀뫼신문

|특별초대석| 성광원 전 법제처장 

“죽기살기로 하다보니 장관도 해보고, 남은 여생도 순리대로~”

 

논산대건고 13회 졸업생인 성광원 전 법제처장과의 인터뷰는 전화로 성사되었다. 본인은 짐짓 고사하는 분위기였으나, 기자가 이러저런 이야기 물어보고 답하다 보니, 통화시간은 50여 분 이어졌다. 

고향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상월은 성광원 전 법제처장의 외갓집이다. 성처장은 1945년생 해방둥이다. 만주에서 살던 아버지는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다. 성처장의 고향은 아버지의 고향을 따라 충북 청주로 명기되나, 태어나기는 강원도 철원쯤이라고 한다. 귀국한 아버지는 “만주에 있는 땅 같은 걸 정리하고 오겠다”며 다시 북상했고, 그 사이에 38선이 생겼다. 남북한이 막히면서 6·25 이전부터 이산가족이 된 집안이다. 

▲ 법제처장 당시 모습     ©

 

 

어렸을 때 어디서, 어떻게 자라났는지요?

어머니는 친정인 상월면 산성리로 왔어요. 상월국민학교 옆에 살았고 학교는 거기 다녔어요. 엄마가 3~4학년때 대전에 나가 살았는데, 그러다 다시 들어오는 과정에서 졸업은 상월서 했지요. 중학교 시험을 치렀는데, 대전중학교에 떡하니 입학을 한기라. 촌에서는 기적이라고 난리였지만, 갈 형편이어야지. 내 인생이 불쌍하다 여겨졌지만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그 당시 노성향교인가? 유교 관련 있는 곳에 고등공민학교가 있었어요. 노성 상월 일대에서 진학 못한 친구들이 다니는 3년 과정였는데, 내가 그 학교에서 검정고시 첫 번째로 패스한 졸업생였나봐. 그래서 진학한 곳이 논산 대처에 있는 대건고였어요. 

 

저도 대건고 출신입니다만, 당시는 어땠는지요?

당시 대건고는 말하기 좀 뭣하지만, 학교 같지가 않았어요. 학년별 1개반씩 총 세반이었고, 주먹다짐하는 친구들도 판을 쳤으니까. 아버지 없는 우리집 삶이 나아질 리도 없었던 상황였어요. 내 인생이 하도 불쌍하여서 교회를 다녔나 봐. 이런 고생 과정을 통해야 사람이 되는가도 싶었고. 아무리 가난해도 밥들은 먹고 살았는데, 우리집은 굶는 때가 더 많았으니....

그래도 청소년기니까 꿈은 꾸었죠. 처음에는 신학을 하여야겠다고 생각했다가 법관을 생각했어요. 내 서울대 법대를 가서 꼭 판검사가 되어 못사는 사람, 억울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보리라, 그런 각오를 다진 학창시절였습니다. 

 

시골에서 서울대를 어떻게 갈 수 있었는지요?

재수는 했어요. ‘기도’라고 알아요? 학원에서 청소 같은 거 해주면서 강의를 듣는.... 말 말아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서 먹고 살랴 공부하랴 실로 고달픈 청춘이었죠. 워낙 배고프다 보니 오히려 목표가 명확해졌어요. 대한민국에서 등록금에 제일 싼 곳이 어디냐? 서울대다. 서울대에서도 좀더 싼 데가 어디냐? 알아보니 사범대는 입학금은 물론 4년 등록금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 내가 갈 길은 오직 저기뿐이야!” 그래서 사범대 사회과를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졸업 후는 어떤 길을 걸으셨나요?

사범대 나왔으니 교사생활도 했죠. 꿈꾸던 법대를 못 갔으니 사법고시는 어려웠고, 대신 행정고시를 패스했어요. 상공부에서 새롭게 공직을 시작했습니다. 5공시절 공무원도 연찬해야 한다는 엘리트 공무원 육성 방침에 따라 제1차 국비유학의 길이 마련되었어요. 그때 나는 미국 캔사스주립대 대학원에 입학, 2년 만에 석사학위를 따고서 귀국할 수 있었답니다. 내 전공이 중소기업분야였는데, 이 분야에서 책을 냈죠. 『중소기업법개설』이 히트를 쳤고 바이블처럼 활용이 됐죠. 이어서 『중소기업론』도 펴냈고요. 이런 학문의 성과 덕에 서강대와 건국대 경영대학원 등에서 중소기업 관련 강의도 했죠.  

 

▲ 임명을 받고 (출처:노무현사료관)     ©

 

 

법제처장 당시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성 처장은, 당시 신문이나 방송 기록으로 가름하겠다고 하여서 기자가 조사해 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2003년 3월 노무현 정부의 첫 내각으로 출범했다. 58세에 초대 장관급 법제처장으로 임명되었으며, 2005년 1월까지 재직하였다. 

임명 당시 평들이 흥미롭다. “70년 서울사범대 졸업후 행정고시 13회로 공직생활에 몸담은 뒤 법제처 내 요직을 두루 거쳐 차장을 지내다 수장에 올랐다. 96년 신한국당 법사전문위원, 97년 한나라당 법사전문위원을 지낸 경력이 이채롭다.” “상공 및 중소기업 분야의 전문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활달한 성격에 다정다감하며 회의때 토론과 대화를 통한 결론 도출을 선호한다. ‘문민정부’ 시절 전문성과 능력을 인정받아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과 그 후신인 한나라당에 법사전문위원으로 파견됐다.”

“몇 해 전 모교인 대건고가 학생들의 식당을 지으려는데 예산을 얻기가 무척 힘들다는 어려움을 듣고 직접적으로 예산을 확보하기 불가능했지만 백방으로 알아보고 도움을 요청했는데 나중에 11억여 원의 예산을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다”는 성 전처장은 모교를 통한 고향 사랑은 변함이 없다.= 이것은 모신문과의 인터뷰 일부 인용이다. 

 

▲ 대전교구 유흥식나자로주교신부, ,민병섭교장신부, 성광원법제처장(우로부터)     ©

 

▲ 가운데 빨간넥타이가 성광원 법제처장     ©

 

▲ 성광원법제처장 기념식수를 마치고(중앙 성광원 전 법제처장, 우측은 민병섭 교장신부, 박용서 교감)     ©

 

법제처장 재직당시, 모교인 대건고에 신경을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가정의 달 국무위원들은 학교에 가서 특강을 한번 하고 오는 게 관례였어요. 다들 서울로 나가는데, 나는 모교로 연락을 했죠. 비서실에서는 답이 시원찮다 하고 그냥 가까운 학교 가자는 거예요. 수업 결손을 우려해서였나봐요. 어쨌거나 재차 연락을 해보라 했죠. 마침 내가 장관으로 임명될 때 학교에서 축전을 보내준 한상준 선생이 있었어요. 통화가 되면서 “특강날 식사는 후배들과 함께 학교에서 먹는 게 괜찮겠는지요?” 묻길래, 흔쾌히 OK를 했습니다.. 

가서 보니까 식당이 좀 그랬어요. 민병섭 교장선생님이 ‘식당은 5억 정도면 지을 거 같다’ 하시길래, 잠깐 나와서 윤덕홍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에게 전화를 했죠.  대건이 공립학교도 아닌 터라 주저가 됐지만 윤 장관은 긍정적으로 검토해봐주겠다고 하더군요. 희망메시지를 남긴 후 서울로 올라왔더니 다음날인가 한선생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교장선생님이 잘 몰라서 그랬던 거 같은데, 최소 11억은 들어야 합니다.” “뭐라고, 그렇게나 많이? 일단은 알았으니 기다려 봐요.” 그때 교육부에는 충남교육청 부교육감이 파견돼 있었는데, “천주교 재단은 돈도 많은데 왜 그런 사립학교를 지원하느냐?”며 반대 입장을 표했고, 이런 반응에 나도 내심 자신이 없어지더라구요. 그래도 윤 장관과는 서울대 사회교육과 선후배지간이어서 이무로웠기에, 저녁 먹자면서 한번 더 얘기를 꺼냈습니다. “거기는 지방이라 재정도 열악한데다 천주교 재단이라서 떼어먹을 사람도 없어요.....” 있는 그대로 부탁을 드렸더니 고맙게도 OK를 해주더군요. 그랬어도 도중에 지연되고 삭감되는 등 우여곡절이 따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9억 정도 지원이 되어 공사를 무리 없이 마무리하게 되었다 하더라구요.  

기공식날 모교를 방문했습니다. 당시 같이 참석한 유흥식 대주교는 5년 후배라면서 인사를 하더군요. 대전교구 나자로 주교였던 거 같은데 얼마 전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으로 임명되었더군요. 각자의 자리에서 크고 작은 일들을 나름껏 해내니까 동문이자 동향인으로서 기쁘고 자부심이 큽니다. 언젠가는 재경동문회도 참석한 적이 있는데 “난 공부만 하고 맨땅에 헤딩하는 삶을 살아왔기에 그간 동문들도 못 찾아봤습니다”고 인사를 했죠.

 

▲ 성광원법제처장 지원 나눔의집 식당건립 기념식수     ©

 

▲ 나눔의 집 식당     ©

 

퇴직 후에는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대학원 강의도 하면서 내 공부도 했어요. 젊었을 때 접었던 신학공부를 했고, 현재는 침례교 협동목사로 있어요. 77세 나이에 특별히 무슨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고, 담임목사가 교회행정이나 목회에서 원로 조언을 구할 때 응하는 정도랍니다. 신앙생활은 가난과 함께 시작된 거 같아요. 먹고 사는 게 얼마나 구차하고 힘들든지 “이럴 바엔 차라리 데려가 주세요”가 기도였답니다. 취업할 때까지 이를 악물고 버텼던 거 같아요. 살아남아야 한다. 먹고 살려면 죽기살기로 이 길밖에 없다. “죽이든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살려서 더 시키든지 알아서 하세요” 이렇게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하는데, 난 솔직히 말해서, 징그럽게 고생만 했던 고향땅에 다시 가서 살고 싶다는 그리움이나 사무치는 마음은 일지 않네요. 오직 살려고만 발버둥친 곳, 어려서 하두 많이 굶어서인지 실은 요즘 내 건강도 좋지를 못하답니다. 이런 얘기가 청년들에게 의미가 있을 거 같아서 이야기 나눠본 적이 있는데, 교감이 잘 안 되는 거 같더라구요. 아무래도 대화는 동시대인이 편해요. 위정식 목사라고, 반포에서 30여 년 목회하다 은퇴하신 분인데 요즘은 그분과 호형호제하면서 지낸답니다. 

당시 어렵게 살아온 사람이 저뿐이겠습니까? 와중에도 지금까지 살게 해주신 걸 돌아보면 신의 은총(恩寵) 아닌 게 없죠! 시간이 좀 됐는데 내 얘기는, 그냥 선후배지간에 격의 없이 나눈 얘기로만 해주면 좋겠어요. 

 

- 이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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