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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기획] 계룡 30년 역사의 발자취-1
두메산골 두마면에서 국방특별시로 우뚝 선 계룡시
기사입력  2021/09/28 [10:01]   놀뫼신문

[집중기획] 계룡 30년 역사의 발자취-1 

두메산골 두마면에서 국방특별시로 우뚝 선 계룡시

- 태조 신도안부터 정감록, 계룡출장소 등 계룡시 태동의 발자취 좇아 -

 

▲ 1983년 신도안(계룡산) 과거 전경     ©

 

올해 9월 19일은 계룡시가 개청한 지 18주년을 맞이하는 날이다. 13년간의 ‘충청남도 계룡출장소’ 기간까지 더하면 계룡의 역사는 30년을 넘어간다. 인구 십만이 넘어야 성립 가능한 시(市)가 계룡시에서는 3만1천 명으로 출범했다. 2003년 9월 19일 ‘충청남도 계룡출장소’에서 ‘계룡시’로 승격되면서 충청남도의 16번째 자치단체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계룡시 탄생에는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1998년 11월 계룡시, 증평시 설치를 위한 법률(안)을 국회에 상정했지만 2000년 5월 제15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되고 말았다. 논산시민단체의 반대도 얼마나 극심했던지, 그야말로 외우내란이었다. 와중에도 2001년 9월 20일 김대중 대통령이 충남도 방문시 특례시 설치를 약속하였다. 2003년 6월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되면서 계룡시 설치에 관한 법률 제6929호가 공포되고 그해 9월 19일 계룡시가 공식출범하게 되었다.

척박하기만 했던 은둔의 땅 ‘논산군 두마면’이 3군본부가 집결한 ‘계룡시’로 상전벽해(桑田碧海)한 것이다. 본지는 연말까지 생생한 역사의 증언과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계룡시 태동의 흔적을 기록함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발판으로 미래 계룡의 청사진 틀을 제시하고자 한다. 

 

6·20사업, 전격 시행과 그 결과

 

제5공화국시절 정부에서는 1983년부터 3군본부를 신도안으로 이전하기 위해 ‘6·20사업’이라는 명칭 하에 비밀리 작업을 진행하였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6·20사업’이라고 불리워지게 된 것은 “1983년 6월 20일, 대통령이 3군본부 이전 사업계획에 결재했다”고 해서라고 한다.

 

“1983년 6월 20일 사업결재일을, 암호명 620사업 또는 6·20사업으로 명명하였습니다. 계룡대가 내려오려고 지은 게 아니라 <행정수도가 내려오려고 지었다>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유성에 있는 국가기록원 620사업계획서에 있습니다.” 

당시 육군기록정보관리단 주임원사였고 퇴임 후 현재는 계룡학연구회장으로 활동 중인 김철규 씨의 증언이다.

 

‘6·20사업’은 유사시 대비할 목적으로 국가보위에 필요한 중요 시설 설치지역으로 선정되어, 이에 따르는 시설 공사를 추진하는 사업이다. 6·20사업은 3단계로 나누어 시행되었다. 1단계 사업은 군사시설보호법을 근거로 사업이 선정된 지역을 군사보호구역으로 설치하였다. 2단계에서는 군사보호구역 내 필요지구 토지매수확보가 이루어졌으며, 3단계는 각종 시설물 설치 공사가 시행되었다.

 

충청남도 계룡출장소 설치

 

 

 

 

 

계룡시 산파의 주역과 논산, 신도안 주민의 생생한 증언 릴레이

 

계룡시 탄생에는 심한 산고가 따랐다. 공식 기록만 보면 이러저런 과정을 밟았나 보다 하겠지만, 그 한켜한켜에는 각계각층의 역사가 묻혀 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때 그시절 관계자들의 입장이 궁금해진다. 

본지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포함, 당시 계룡시 탄생과 직간접 관련이 있던 분들의 증언을 경청한다. 도중 주제에서 다소 빗나갈지라도 현대사라는 맥락에서 함께 기록해둘 계획이다. 그 첫 번째 테이프를 계룡에서 태어나 계룡살이 70여 년을 이어오고 있는 김기중 문화해설사가 끊어준다. 

 

▲ 김기중 문화해설사     ©

 

[김기중 문화해설사가 기억하는 6·20 당시 신도안 풍경= 나는 계룡시 이전 두마면의 원주민입니다. 계룡산 아래 신도안이 국방수도로 등극하는 역사를 지켜보았는데, 그 원주민들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현재 계룡시 향토인은 7%정도니까요. 그래선지 계룡시에 살고는 있지만 계룡 역사를 잘 모르는 시민들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천하길지 십승지(十勝地) 계룡의 역사 이야기를, 6·20 사업 전후하여 들려 드립니다.]

 

1983년 계룡대공사가 시작되었는데, ‘6·20사업‘이란 이름은 1983년 6월 20일 [계룡대 이전사업 계획]을 당시 전두환대통령이 결재한 날짜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계룡대공사는 그때부터 육군본부 이전일인 1989년 6월 27일까지 6년간 이루어졌어요. 1차 입주는 육군본부가 그 해 6월에 했으며, 계룡대 개소식은 7월 5일 이종구 육군참모총장과 신말업 참모차장때 했습니다. 이어서 같은 7월에 2차로 공군본부가 이전했지요. 그리고 해군본부는 마지막으로 1993년 이전했습니다.

이렇게 두마면이 계룡시로 변신하고 국방특별자치시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우리 한반도 역사 흐름의 귀결이라고 봅니다. 계룡시 신도안면에는 조선 왕성의 도읍지 신도내 주초석과 독립운동의 요람 삼신당이 있습니다. 삼신당은 천지인 3칸 집 사당인데, 은둔지로서 독립운동을 하던 곳입니다. 암용추 부근 대리석 같은 너럭바위가 있는데, 태조 이성계가 기도한 곳으로 알려져 있지요. 석간수가 생명수인 그 근방에 빨간 벽돌 고아원이 세워졌어요. 인근에는 계룡호텔이 있었는데, 나중에 랑데뷰식당으로 바뀌었습니다.

계룡시에는 조선시대 유적지도 많아요. 두마면에 소재한 모원재 (좌의정 서석 김국광 제각), 사계고택 (문원공 사계 김장생), 염선재 (사계 정부인 순천김씨 절재공 7대손녀 제각), 신원재 (사계의 구자 제각)와 금암동에 위치한 이심원 현판 (효령대군의 증손) 등이 있습니다. 그 후 일제강점기 나라의 독립은 요원해지고 민심이 흉흉할 때 정감록 사상을 신봉한 많은 사람들이 계룡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일제시대 신도안은 정감록설이 급속도로 유포되었습니다. 미일전쟁이 끝나고 왜정이 물러가면서 한국 독립이 이어질 때 그때의 도읍지가 신도안이라고 믿는 사람이 급증하였지요. 3.1운동 후 정씨가 유서 깊은 신도안에서 왕국을 건설한다는 정감록상의 예언대로 3·1운동 전 후로 믿는 사람들이 급격히 증가하여 1924년 동학계 김연국이 교인 천여 명을 데리고 신도안 용동리에 자리잡기 시작했어요. 그 해 신도안의 호수 및 인구가 총 892가구에 4,565명이었습니다. 해방 후 정감록 사상으로 신종 유사 종교가 급격히 늘었는데, 열차와 트럭 등으로 유입 속도도 빨라졌어요. 1955년 8월 당시 1086세대 5700명이 살았으며 신흥종교 및 무속인들이 계룡산을 무단 점유하며 130여 개의 종교가 번성했으니까요. 

1975년 시작된 계룡산 정화사업은 1979년까지 지속되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서거로 중지되었습니다. 특히 1975년 8월~12월은 국립공원 계룡산 자연정화사업 초창기이자 절정기로 이 일대가 대거 철거되었지요. 당시 나는 두마농협 신도지소장이었는데, 4명의 직원과 함께 금융 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부남리, 석계리, 용동리가 당시 내 영업 지역이었습니다.

산아래 동네에는 계룡호텔도 있었고, 금강여관이 있던 곳이었죠. 산 위에는 암자나 기도원, 철학관, 굿당 등 유사종교단체가 130여 곳에 달했습니다. 각자 모두가 교주로서, 천황봉 같은 곳에 제단을 쌓기도 하였지만 나무에 동아줄을 묶어놓고 신으로 모시기도 하고 주변의 자연이 그들 각자의 신이 되기도 했습니다. 교주들은 산속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 내려오기보다는 “돈 받으러 오라”는 전갈이 오면 농협 직원들이 산중턱의 자전거나 오토바이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갔어요. 나머지는 걸어 올라가 돈을 받아 수기로 적어주고, 하산하여서는 통장을 덜컥거리는 기계에 넣어 입력하였죠. 인쇄된 통장은 나중에 갖다 주었는데, 아예 통장을 맡겨두는 곳도 있었답니다.

1975년 유신시절 8월 여름에 시작된 철거는 국토대 같은 용역이 새마을 모자를 쓰고 철거기구로 무장한 채로 동네에 들어섰어요. 망치나 도구를 쓰는 힘센 무속인들의 반항도 만만찮았지만, 결국 12월까지 모두 철거되었습니다. 정장리, 용동리, 남선리, 석계리, 부남리 등으로 구성된 신도안면은 6·25때도 인민군이 못 들어온 은신처이었지만 철거반의 철퇴에는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철거당한 130여 곳 교주가 이주해간 곳은 신원사쪽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는 흑석리, 장태산 등 인근이었지만 지리산까지 간 사람도 있다 들었습니다.

계룡에는 옛 ‘논산군 두마면’의 원형이 남아 있는 곳이 몇 곳 있어요. 면보다는 작고 리보다 큰 곳을 ‘실’이라 했는데, 구레실, 소라실, 대실 등입니다. 대실은 농소리가 있던 곳인데, 그래서 지금 대실지구라고 부릅니다. 그 컸던 소라실, 즉 유동2리는 현재 30세대 정도의 전원주택 단지가 들어서 있습니다. 합판길이라는 도로명이 있는 광석리 역시 마차가지입니다. 합판이란 도곡리, 향한리, 유동리의 세 물머리가 합쳐져서 흐르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 심대평 전 충남도지사     ©

 

[계룡시 산파의 주역 심대평 도지사의 회고 = 계룡시를 태동시킨 ‘국방수도 계룡’의 산모(産母)는 1988년부터 충남도지사를 4번 연임한 도백(道伯), 심대평 전 충남도지사와 최홍묵 현 계룡시장이다. “One of them이 아닌 Only one을 지향하며, 바로 보고, 더불어 보고, 멀리 보는 지혜를 찾아야 한다”는 심대평 전 충남도지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계룡시가 탄생하게 된 가장 큰 명분이자 이유는 ‘3군본부’ 이전입니다. 1989년 1월 1일, 충청남도에서 대전시를 분리하였고, 1989년 논산군 두마면에 3군본부가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육군, 공군 순으로 들어섰으며, 1993년 해군본부가 이전하며 3군본부 이전이 완료되었습니다. 충청남도 계룡출장소는 1990년 두마면에 만들었습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계룡시의 역사는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룡시 탄생이 올해로 ‘18년’이 아니라 ‘32년’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2003년 도지사 시절, 국회에서 계룡출장소를 특별시로 만드는 협의과정에서 “계룡시는 인구와 면적에 상관없이 국가안보를 위해 꼭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니까 “국가가 지원을 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고, 그래서 계룡시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 개청은 도지사 한 사람이 앞장선다고 해서 될 사안이 아닙니다. 청와대와 협의 후로도 논산시민과 계룡시민이 계룡시를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주었습니다. 당시, 논산시의회 의장이던 최홍묵 시장의 지혜와 노력이 없었다면 계룡시는 아마 탄생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논산시가 합의를 안 해주면 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이런 우여곡절 끝에 계룡은 14년 만에 시로 승격될 수 있었습니다.

최홍묵 시장과 저는 계룡시 승격을 논의할 당시, 가장 중요한 설득 논리는 ‘계룡시의 규모‘가 아니라 ‘계룡시의 특색’이었습니다. “계룡시는 3군본부가 있는 안보의 핵심도시로서 3군본부가 위치한 계룡시에 가족을 맡기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계룡시 승격의 설득 논리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청와대도 국회도 반대 의견을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3군본부가 있는 군사 전원 문화도시를 조성하면서 면단위 행정으로는 불가능하며, 충남도 직할출장소 설치 때부터 시규모로 출발하였다는 점을 명분으로 세웠습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계룡은 14년 만에 시로 승격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국회 소위원장이 “왜 JP가 총리할 때 하지, 지금 어렵게 한 분 한 분 설득하고 다니느냐?”며 저에게 핀잔을 주었던 기억이 새롭군요.

군사·문화·전원의 도시가 가능하고, 군인 가족들이 계룡시에 와서 생활과 자녀교육에 조금도 불편한 도시가 되지 않게끔 만드는 것이, 계룡시 탄생 당시 현안이었습니다. 용남고등학교가 군학교처럼 지원할 수 있는 분위기도 만들고, 충남도는 물론 교육청도 전 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선생님들을 배치하여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전력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용남고가 얼마나 우수한 학교로 발전했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도지사로 근무할 때만 해도 학업 실력이나 체육이나 모든 면에서 도내 명문고 중 하나였습니다. 

교육도 그렇지만 당시 계획했던 전원·문화 도시로서 전반적으로 상당한 진보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향적산을 중심으로 한 ‘향적산 치유의 숲’을 조성하는 것은 최홍목 시장의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계룡산 중심의 향적산을 전원·문화 도시의 아이콘인 치유의 숲으로 접목한 것은 계룡시민을 위한 삶의 질까지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문화는 물론 산업에서도 계룡시가 생각보다 빠른 시간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제2산업단지까지 확충해가는 가운데 이케아, 가스공사 기술교육원 같은 굵직굵직한 기관들이 들어와서 공해 없는 청정도시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계룡시다운 발상과 기획들이 새로운 일자리도 창출하고 무공해 자연친화도시로 나아가는 좌표가 되면 좋겠어요. 

 


[정리]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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