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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연무읍 봉동3리 한글대학 조정애 님 "인생3막의 행복; 인생은 70부터"
기사입력  2020/09/08 [17:45]   놀뫼신문

[연무읍 봉동3리 한글대학] 조정애 여사

인생3막의 행복; 인생은 70부터

 

 

조정애(76) 여사의 삶은 누가 보아도 평범하다. 지극히 투박한 희노애락 속에서 단순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그들 부부와 연결된 이들의 괘도이탈은 그녀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시아버님의 딴 살림, 시숙과 동서와의 갈등과 그들이 이웃에게 주는 피해가 그랬다. 그녀는 이제 와서 알아챘다. 평범 속에 소소한 행복이 깃들여 있었음을. 오히려 누추함 속에 행복이 있고 화려한 삶 속에 불행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본 셈이다. 자신은 가난해서 몸 고생은 했지만 그것을 극복하면서 빈손으로 일군 농토와 자식들이 값져 보인다. 고희 지나면서 찾아온 인생 3막이 진정 나만의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 소확행이었다.


 

 

나는 1945년 이리 근처 오산에서 태어나 오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위에 오빠가 두 분 계시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오빠들 덕으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물다섯에 친척의 중매로 이리 갈산동(익산)에서, 이곳 연무 봉동의 칠등 마을로 시집을 왔다. 신랑은 28의 강문희였다. 어머니가 계셨고 형님 내외는 분가하고 시동생이 한 명 있었다.  

이럴 수가, 이 집엔 논 한 마지기, 밭 한 뙈기가 없었다. 가을이었지만 광에는 쌀이 없었다. 이렇게 가난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있는 것은 아카시아 나무를 땔감으로 쌓아놓은 게 전부였다. 하루하루 남의 일을 해서 먹고 사는 집이었다. 

새색시의 녹의홍상을 바로 벗어 버리고 그 당장 남의 집 일을 나섰다. 쌓아놓은 나무를 다 때고 나니 나도 나무를 하러 나서야 했다. 혼자서 머리에 이지 못할 정도의 솔잎을 묶어 땔감으로 해 와도 그게 이삼일을 못 갔다. 

내가 한창 바삐 살던 1977년 11월, 아버지처럼 의지하던 큰 오빠가 이리역 화물열차 폭발 사건으로 돌아가셨다. 설상가상 다음 해 둘째 오빠가 철도국에서 일어난 사고로 돌아가신 것이다. 노령의 어머니가 누워 버리고 나는 천애의 고아가 되다시피 혼자가 된 슬픔으로 살 힘을 잃었다. 내 삶에서 제일 마음 아프던 시절이었다.

 

▲ 약혼사진     ©

 

▲ 남편 그리고 아들 셋과 함께     ©

 

쌀 100가마 계(契) 3번

 

세월은 슬픔을 가져갔다. 여전히 남의 일로 살아가면서 아들 셋을 내리 낳았다. 한창 모 심을 때 낳은 둘째는 만삭의 몸으로 남의 모를 심으러 다니며 낳았다. 남편은 노가다 일도 마다 않았고, 나 역시 남의 온갖 일을 가리지 않았다. 

이렇게  두 내외가 힘을 합해 열심히 살 때였다. 논 한 뙈기 없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 만원 계를 들어 저축을 하다가 큰마음 먹고 쌀 100가마 계에 도전했다. 1년에 쌀 5~6 가마를 부어야 하는, 부담이 큰 계였다. 쌀 다섯 가마란 우리 식구가 잡곡과 함께 1년치 먹을 양식이었다. 사실 쌀 백 가마니는 집 한 채 값이기도 했다. 

우리 내외를 착실하게 보아주는 이웃이 제안을 해 왔다. 외상으로 논 다섯 마지기를 줄 터이니 계 타면 갚으라고 했다. 이런 행운이 오다니, 그렇게 내 농토가 생긴 것이다. 얼마 후 동네에서 또 쌀 100가마니 계를 하면서 ‘3번을 주겠다’고 했다. 

동네에선 우리 내외의 신용을 믿었고, 동시에 큰 도움의 손길을 베푼 거였다. 다시 논 네 마지기를 마련한 것이다. 뒤 돌아보면 이 때의 삶이 제일 신나고 재미있었던 것 같다. 

 

가난뱅이 시아버지의 애첩

 

내가 결혼했을 때, 이미 시아버님은 따로 나가 살고 계셨다. 멀지 않은 이웃 동네에서 딴 살림을 차렸다. 거기서 아들까지 두고 사셨다. 시아버지 앞으로 아무 농토도 없으니 재산을 가져가신 것도 아니고, 본가에도 밭 한 뙈기 없이 남의 밭을 빌려 살고 있으니, 어려운 건 본처의 집이나 애첩의 집이나 매 한가지였다. 허나 본처는 착실한 둘째 아들 내외가 큰 울타리 였고, 애첩은 본처의 남편을 차지하고 그 남자를 먹여 살렸다. 어머니는 손자들의 재롱 속에서도 매사에 의욕이 없었다. 그저 어디서 약초를 구해와 자신의 몸을 잘 살피는 게 낙이었다. 하긴 그 덕에 장수하셨지 싶다.

드디어 시아버님 회갑이 돌아왔다. 외지에 나가 성공하신 동생 분께서 형님의 회갑 잔치 비용을 내주셨다. 그렇게 해서 잔치가 끝났는데, 시아버님께서 당신 거처로 안 돌아가시는 거였다. 우리 내외에게 할 말씀이 있다고 하셨다. “둘째 며느리야, 너하고 같이 살면 안 되겄냐?” 그 무렵 애첩의 괄시를 필시 받으셨던 것 같다. 그렇게 머무르시던 차, 어느날 그 애첩이 들이닥쳐, 선물로 들어온 이부자리며 온갖 것 다 싸서 머리에 이고 영감을 끌고 가버렸다. 시아버님은 조상님 제사 때나 집안 대소사 때 뵐 수 있었다. 둘째 아들보다 더 살다가 돌아가셨다. 

 

▲ 연무체육대회에서 영감과 색시로 분장     ©

 

 

딸기농사, 아들셋 농사

 

우리는 일찍이 딸기농사를 시작했다. 지금이야 하우스도 단단하고 스마트 시설까지 있어 농사짓기가 수월하지만 당시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가을 벼를 수확하기 바쁘게 논을 갈아 딸기 묘판을 만들고 모종을 했다. 신통치 않은 골조에 비닐을 입혀 딸기를 길러 이른 봄부터 출하했다. 한철 딸기를 따고  봄철 모 심을 때가 되면 비닐하우스를 철거하고 다시 논을 조성하여 벼를 심었다. 

그렇게 일해서 새 집도 짓고 아들 셋 공부도 시켰다. 아이들은 별 탈 없이 자라 둘은 강경상고를 나왔다. 셋째는 럭비선수로 대전 동화고등학교에 스카웃되어 선수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선수 세계의 선후배 관계는 지엄해서 그 고충을 이겨내지 못했다. 나는 매일 한 달을 좇아다니며 사정해서 셋째를 연무기계공고에 전학시켰다. 큰 아들 내외는 우리와 한 집에서 4대가 살다가 손주 학교 들어 갈 나이에 시내로 분가해 나갔다. 지금 큰 아들이 쉰 한 살, 둘째는 마흔 아홉, 셋째가 마흔 일곱 살이다. 손주가 넷이다. 

 

 

내가 직접 써가는 인생 3막

 

 남편이 쉰아홉에 간암으로 떠난 지도 이 십 여년이 흘렀다. 나는 그간 둘째 아들과 딸기 농사를 지으며 세월을 보냈다. 사이사이 국내 여행이며 외국 관광을 다녀왔다. 허리는 굽었지만 난 아직 일이 재미있다. 고희 지나면서 “아, 지금이 제일 좋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세상을 모르고 살다가 마을 보건소의 건강과 취미 프로그램에 동참했고 논산시의 동고동락 사업의 일환인 한글대학에서 다 잊어가던 한글 공부를 하며, 내 인생을 돌아보았다. 거기서 내 인생을 글로도 써 보았다. 이만하면 무슨 여한이 더 있겠는가!!  

 

- 안정혜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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