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충남지역언론지원사업-3] 동학농민혁면, 충남에서의 발자취를 따라서
동학농민혁명 천안 세성산전투
-다시 피는 세성산 들꽃
[충청의 동학, 논산에서 함성을 토하다]
① 충남지역 동학농민혁명 기인에 대한 서론
② 논산회맹(논산의 집결과 결전)
③ 충청1 북부권- 천안상황(세성산 전투 중심으로)
④ 충청2 공주 전투(이인, 우금치와 세종 첫마을 벌-대교리
⑤ 충청3 서부 내포권(당진-승전목/ 예산-관작리, 내포 등)
⑥ 논산 황화산성, 절며 돌아가는 길(금구로, 대둔산으로)
⑦ 동학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나?(“싸우러 갔다가 왜 팔목을 놓고 오셨소”)
⑧ 논산 - 농민회의 남접북접 만나는 행사
이번 호에는 북부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최북단 격전지였던 천안 세성산전투를 소개한다. 지난 한 해 천안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을 조명하고 기념하기 위해 ‘동학3·1혁명의길’, ‘세성산문화제’, ‘이이화선생님 초청강연회’ 등의 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했던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이용길 회장이 그 역사의 현장을 동행하였다.
▲ 천안시 북면 연춘리 복구정(伏龜亭). 마치 거북이 한 마리가 엎드리고 있는 자라바위 혈처에 위치한 정자이다. 이곳은 천안, 진천, 전의, 충주, 청주 등지의 동학농민군의 정신적 구심점인 복구정포이다. 세성산과 작성산의 중간 지점으로 동학농민군의 1차집결지이기도 했다. 복구정포를 설명하는 이용길 회장 ©
|
반란에서 혁명까지
“작년 2019년에 동학농민혁명 125주년을 맞아 황토현 전승일인 5월 11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여 정부가 주관하는 기념행사가 처음 열렸습니다. 2004년에 동학농민혁명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고 이제야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으니 ‘반란에서 정당한 혁명으로 평가받기까지’ 125년 걸린 셈입니다.”
‘우리 근대역사의 출발점이요, 민주주의의 뿌리인 동학농민혁명이 긴 세월과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이제야 비로소 제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라고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이용길 회장은 말을 이어간다.
그동안 천안에서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조사나 기념사업은 고사하고 유적지의 안내표지판조차 세워져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부끄럽게도 ‘농민반란의 역사로 치부한 채 참고할 만한 연구논문 한 편이 없었다’고 덧붙인다.
그래서 그는 지난 한 해 동지들과 뜻을 모아서, 천안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을 조명하고 기념하는 여러 활동을 해왔다. 그 격전지의 중심인 세성산에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동학농민혁명 천안기념사업회'를 발족하였다. 아울러 기념관과 연수원 등을 건립하기 위한 다방면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한 세기 하고도 4반세기가 지나서야 반란에서 혁명으로 재조명받기 시작한 것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세성산의 모습. 해발 180m의 얕은 야산이지만 북쪽 경사면은 자연 성벽으로 산세가 가파르고 험하다. ©
|
▲ 천안시 동면 죽계리에 위치한 동경대전 목천판 간행소 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동학의 접주였던 김은경의 집터가 있던 곳으로 주변은 등나무 군락지이기도 하다. 물길을 따라 가면 직지 간행소인 청주 흥덕사가 지척이다. ©
|
천혜의 요새 세성산에 집결
1894년 3월에 전라도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7월에는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9월에는 대일본전쟁을 선포하고 10월에는 서울로 진격할 준비를 하게 된다. 이렇게 농민군의 위세가 점점 커지자 친일조정은 동학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일본군에 동학농민군을 토벌할 출병을 공식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 때가 9월 18일이다.
그 해 11월 18일 드디어 동학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것이 천안 세성산전투이다. 이 전투가 주목받는 것은 그 규모도 규모려니와, 지정학적 위치상 동학농민군 진영의 최북단에 있고 서울과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에 일본군이나 친일관군에 가장 위협적이어서였다.
그러면 일단 <세성산이 왜 지정학적으로 요충지일 수밖에 없는지> 살펴보자.
세성산은 현재 충남 천안시 목천면과 병천면, 성남면 사이에 위치한 해발 180m의 야트막한 야산이다. 그러나 이 산에 오르면 주변 지역을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다. 사통팔달하는 교통도로망에 접해 있어 그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러니 전략적 요충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산의 북쪽은 절벽을 이루고 있고 남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북쪽으로부터 오는 일본군과 친일관군을 경계하고 방어하기에 용이하고, 남쪽으로부터 오는 지원군이나 군수물자를 조달받기에 적합한 지형이다.
또한 세성산 정상에는 길이 144m, 높이 3m의 내성과 길이 350m, 높이 3m의 외성이 있고, 길이 412m 폭5m의 보루가 있어서 예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면 이번에는 <이곳에 집결하여 주둔한 동학농민군의 기병 상황>을 살펴보자.
천안지역 동학농민군은 김복용과 이희인을 중심으로 기병하여 세성산으로 집결하였다. 김복용은 북접 소속 대접주로서 세성산 동학농민군을 총지휘한 대장이었다. 세성산전투 이전의 천안 지역의 활동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다른 지역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이희인은 천안 지역에 기반을 둔 동학지도자였다. 이희인(1846~1894)은 목천현 병천면 병천리 개목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줄곧 살았던 양반 가문의 선비였다. 그는 1893년 동학도 광화문 복합상소 시기에 허연, 서병학 등과 연명하였을 정도로 동학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또한 세성산전투 당시에는 좌우도(左右道) 도금찰(道禁察)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세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김복용을 중심으로 한 외부세력이 주도하는 가운데 이희인과 같은 토착세력이 인적, 물적 지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세성산 일대를 중심으로 기병하여 주둔지로 삼은 것은, 차후 서울로의 진격을 위한 교두보로 삼고자 해서였다.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농민군과 최시형이 이끄는 농민군 모두가 서울로 올라갈 상황에서 세성산에서의 집결과 주둔은 의미가 컸다. 당시 동학혁명군은 어느 곳에나 있었지만, 특히 이곳은 지정학적으로 볼 때 위치상 동학농민군 진영의 최북단에 있고 서울에 근접해 있어서 친일관군이나 일본군에게는 좀더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전국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한 관군과 일본군의 출병 규모>를 알아보자.
관군은 9월 14일부터 본격적으로 투입되기 시작하였다. 그 내용은 친군경리청병 703명, 친군장위영군 850명, 친군통위영군 401명, 교도대 328명 등 총 2414명이었다. 이두황과 이규태가 이들 관군을 인솔하였다. 이두황 군대는 9월 20일 서울을 출발하여 경기도 죽산을 거쳐 충청북도 청주 방면으로 진군하였다. 이규태가 이끄는 관군은 서울을 출발하여 경기도 수원을 거쳐 천안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그와 동시에 조정은 일본군대에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출병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 출병한 일본군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특별히 파견된 후비보병독립 제19대대, 그리고 병참부에 소속된 수비병 약 5800명, 그리고 해군 군함 2척과 해병대 2개 중대였다. (이 수치들이 다소 과장되어 있지는 않은지, 확인 필요는 있다.)
일본군의 출병보다 더 끔찍한 것은, 동학농민군의 진압 통제권을 전적으로 일본군이 행사했다는 것이다. 당시 출병과 전투 상황을 기록한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을 보면, “동학당을 진압하기 위해 전후로 파견된 조선군 각 부대의 진퇴와 조달은 일본군 사관의 명령에 따라서 하며 일본 군법을 지키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로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 세성산 남향 양지바른 기슭에 위치한 세성산전투 희생자 위령비. 2012년에 건립되었다. ©
|
▲ 동학농민군의 집결지이며 세성산전투에서 패하여 많은 농민군이 피신하였던 작성산이다. 동학농민군의 기포 당시 그 기슭에서 농민군들이 야영을 하며 훈련을 받기도 한 지역이다. 평등(平等)을 외치며 모인 동학군의 1차 집결지가 지금은 소수만 이용하는 골프장이 되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
|
참패한 동학농민군의 세성산전투
세성산전투는 10월 21일 새벽부터 벌어졌다. 세성산에는 김복용과 이희인이 이끄는 농민군 약 4천 명이 집결하고 있었다. 근방 공주, 옥천, 영동, 예산 등에도 농민군이 집결하여 남쪽에서 올라올 전라도 동학농민군의 북진과 합치고자 대기하고 있었다. 그 중 천안 세성산이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군으로서는 이를 제압하지 않고는 안심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에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인 장위영군이 세성산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수적으로는 세성산에 주둔하고 있는 동학농민군이 몇 배 우위였지만, 소총과 대포로 중무장 훈련된 관군과는 전력 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은 맞은편 산에 병력을 배치하여 지원사격을 하였다. 일부 병력은 북쪽 절벽 밑에 매복하고, 일부 병력으로 완만한 동남쪽 기슭으로 총을 쏘며 정상을 향해 공격을 감행하였다.
농민군은 삼면이 깎아지른 절벽을 이용하여 거세게 항전하였다. 그렇지만 관군의 막강한 화력에 압도당하여 결국 많은 사상자를 내고 군수품을 빼앗긴 채 패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이 가운데 수백 명은 세성산에서 북동쪽으로 20리 정도 떨어진 작성산(병천면 위치)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북쪽 절벽 밑에 매복하여 기다리고 있던 관군의 공격을 받아서, 그 피해는 더 커졌다.
세성산전투의 패배로 인한 동학농민군의 피해는 막대하였다. 세성산 정상에 쌓아놓은 다량의 무기와 군량미를 빼앗겼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개벽(開闢)을 원하며 각지에서 모여든 농민군의 죽음이 안타까웠다. 전사자 370여 명, 중경상자 770명, 포로가 17명이었다고 하니 사상자를 천 명 이상 낸 대패배였다.
세성산전투에서 농민군을 이끈 지도자 김복용 등 지도자급 농민군 22명은 체포되어 현장에서 처형당했다. 이 밖에 세성산에서 흩어진 농민군은 공주 유구쪽으로 많이 흘러들어가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공주유구를 ‘목천(천안)동학도의 소굴’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렇다.
그 의의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
천안 세성산이 갖는 지리적 이점과 전략적 중요성으로 보았을 때 동학농민군의 실패는 정규군과의 화력의 격차를 실감하게 하는 처참한 현장이었다. 이는 곧 동학농민군의 전체적인 전력 약화를 초래하기에 이른다. 관군의 입장에서는 농민군의 기세를 꺾음으로써 진압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로써 동학농민군이 세성산에 집결하여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했다.
이 전투 이후 동학농민군은 곳곳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으나 수세를 면하지 못하고 패배를 거듭한다. 강원도 홍천의 서석전투, 전봉준 부대의 이인효포전투, 충남 홍성전투, 충북 증약전투 등에서 연이어 패배함으로 동학농민군의 전체 전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세성산전투는 1894년 가을, 승승장구하던 동학군의 기세가 꺾이는 첫 분수령이었다.
125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세성산전투는 많은 과제를 남겨주었다. 우선 부족한 사료를 발굴하는 일이다. 동경대전 목천판이 간행된 김은경의 집터 복원과 그의 행적 조사, 세성산전투의 과정 및 이후 관군의 살상 실태 파악에서 그치지 않는다. 세성산이 시성산(시체가 쌓여 이루어진 산)으로 불리는 연유는 무엇인가? 당시 동학농민군 집단매장지였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 지역 동학농민군 후손들의 증언 채록 작업 등 남겨진 숙제는 많기만 하다.
현재 천안역사문화연구회 등 천안의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이곳 세성산에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이와 함께 기념관과 연수원 등을 건립하여 이 지역을 생태역사공원으로 만들 계획을 갖고 추진 중에 있다. 이렇게 되면 세성산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독립기념관, 3·1평화운동 충남백년의집, 유관순기념관으로 이어지는 명실상부한 역사문화교육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기록·정리] 전해주/ 이진영/ 성수용 기자
<이 기획기사는 2020년도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서 취재한 것입니다.>
[ 초대합니다 ]
동학농민혁명 126주년을 맞이하여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를 창립하고자 합니다.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중추였던 ‘논산동학’을 되살리는 자리입니다.
이 뜻깊은 역사적 자리에 논산시민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새 역사 물결에 동참해주시면 큰 반가움이겠습니다.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장 김선덕
♧ 때: 2020년 6월 25일(목) 늦은7시
♧ 곳: 논산문화원 다목적홀
♧ 문의: 배형택(010-2399-6347)
♧ 후원: 농협 351-1132-4958-13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