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같이 돌자 동네한바퀴] 채운면 우기리
‘큰우기’라 우기시던 우기리 할아버지^
문득 고향 집이 떠올랐다. 커피 잔에 남은 흔적처럼 깊고 어두운, 그러나 여전히 내 기억 속에 향기롭게 똬리를 틀고 있는 집. 프랑스 구조주의의 선구자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저서 『공간의 시학』에서 집과 세계를 언급하며 “참된 안락이란 과거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해석이나 어떤 철학적 사유를 펼치지 않더라도 우리는 알 수 있다. 옛집의 추억을 통해 누구나 공간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논산에 산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처음 논산에 내려왔을 때는 한 학기만 강의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갈 요량이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지 않아 몸과 마음이 온통 논산에 붙잡히고 말았다. 강의가 끝나면 드라이브 삼아 무심코 찾았던 숯골, 골말, 엄뜸, 큰우기, 장구메마을… 그리고 마을의 이름을 빼닮은 사람들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아니다, 논산을 떠나지 못한 것은 어쩌면 향수병을 앓던 나 자신 때문인지도 모른다.
2011년 겨울, 논산시 채운면 우기리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노인은 마을 우물가에서 사진을 찍는 낯선 이에 한눈을 팔다가 그만 넘어졌다. “옛날에는 이 우물로 마을 전체가 먹었어. 그래서 여기 이름이 큰우기야. 지금은 수도가 들어와.” 노인은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성큼 다가와 이야기를 건넸다. 마을의 옛 이름이 ‘임금터’이고 잘 사는 나라가 되었을 때 도읍이 된다는 전설이 있지 않느냐고 묻자, “그 말도 맞아. 우물도 있고 임금도 나고.”라며 웃었다.
노인은 대뜸 딸기 좀 먹고 가라며 앞장서 걸었다. 마을 뒤쪽에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허리를 잔뜩 구푸리고 들어서야 하는 높이였다. “이 동네도 젊은 사람이 육십대야. 나도 젊었으면 크고 튼튼한 비닐하우스 짓고 농사할 텐데… 눈이 많이 오면 무너져, 그래서 눈 오면 자다가도 깬다니까. 겨울에 얼까 봐 안에 비닐을 하나 더 쳤는데 힘이 부쳐서 저걸 어찌 걷어내야 하나 벌써부터 걱정이야.” 몇 개 남지 않은 이 때문인지 오랜만에 얘길 나눈다는 노인의 말이 한숨소리처럼 들려왔다.
인연의 끈은 실타래와 같아서 기억을 짜깁기하는 힘이 있다. 마트에 새로 나온 딸기를 보거나 제법 많은 눈이라도 내릴라치면 큰우기에서 만난 노인이 떠오른다. 그때의 기억은 상상의 집을 짓는다. 지금도 혼자서 농사일을 할까? 아니면 대전에 산다는 자식들에게 갔을까? 노인과 함께했던 공간은 옛집처럼 여전히 마음의 언저리를 따스하게 만든다. 이러한 인연의 끈을 차마 놓을 수 없어 논산 시민으로 10년을 살고 있다.
놀뫼신문이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를 연재한다. 반가운 소식이다. 한동안 나도 똑같은 제목으로 블로그를 연재하였다. 그 중 하나인 “우기리 노인의 글과 사진”은 https://blog.naver.com/poet314/60148926896 로 볼 수 있다.
최근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마을자치회를 출범시킨 논산시는 마을공동체의 활성화를 통한 풀뿌리 주민자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에 발맞춰 놀뫼신문이 연재하는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도 마을자치회에 활력을 보탤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 주변에는 잊혀져가는 것들이 많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를 유배시킨 듯 살아가는 이웃들과 우리가 떠나오면서 온기를 잃어버린 빈 집들, 이제라도 관심을 갖고 한번쯤은 찾아볼 일이다.
장수현(건양대 이주민사회통합연구소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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