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노트] 논산화지중앙시장 간장집 전 대표 윤수완(尹秀完, 82세) 옹
‘간장집’에선 간장을 팔지 않습니다
코로나19 여파로 논산 화지중앙시장은 한산하기만 하다. 전국에서 확진자가 가장 적게 나온 곳이 충남이고, 논산에는 단 한 명의 확진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장을 보러 오는 손님은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문을 닫은 가게도 많이 눈에 띈다. 이 봄과 함께 하루빨리 코로나19가 잡히기를 기원하며 화지중앙시장에서 50년 넘게 간장집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장사를 해왔던 화지시장 터줏대감 윤수완 옹을 만나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너무도 힘들었던 초년 시절, 반면 풍족했던 38시장
그는 1938년 논산시에서 가난한 집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도시 노동자로 그 많은 식구를 책임져야만 했다. 가난은 구차했지만 일상이었다. 도시에서의 가난은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 것이 문제인 그런 차원의 가난이었다. 허구한 날 굶었다. 그러면 그의 어머니는 멀리 들에 나가 독새풀 꽃을 훑어 그것을 갈아 끓여서 우리 남매들 입에 넣어주었다. 그것을 먹으면 배가 몹시 아팠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빈 창자가 달라붙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이렇듯 궁색했다.
하지만 그가 사는 논산은, 그 중에서도 장이 서는 대교동은 상당히 풍족한 곳이었다. 3일과 8일에 서는 오일장은 주변 강경, 공주, 부여, 서천은 물론 전라도 익산에서까지 모든 농산물과 수산물이 모이는 집산지였다. 서해 조기를 실은 배들이 강경을 통해 논산까지 들어왔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를 어림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1951년 한국전쟁 중에 육군훈련소(논산훈련소)가 생기자 이곳은 더욱 번창했다. 많은 군인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면회객들로 유동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문물의 대규모 집산지에서 활발한 소비지로까지 확대된 시점이기도 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본다.
“장이 서는 3일과 8일이 되면 논산 시내 전체가 인산인해를 이루어 전부 장바닥이 되지요. 논산 들어오는 모든 길목이 다 막히고, 시내 어디를 가도 어깨를 부딪히며 걸어 다닐 지경이 됩니다. 논산에서는 개똥을 갖다 팔아도 사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어떤 장사도 잘 됐어요. 사람이 엄청 많이 몰렸으니까요.”
이 오일장은 이후 1971년도에 공설시장인 중앙시장으로 합쳐지고 이후 화지중앙시장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제대후 행상과 결혼, 그리고 간장집 개업
그는 육군에 입대했고, 고향에서 멀지 않은 가수원에 위치한 공병대에서 근무했다. 그러다 1963년도에 만기 제대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시장에서 행상을 하기 시작했다. 많은 식구들을 위해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런 그의 성실한 모습을 눈여겨보았던 지금의 처형이 자신의 동생과 그를 중매했다. 그래서 1965년도 그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다. 신혼이었지만 그에겐 힘든 기억뿐이다. 하루하루 살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정을 이루니 그에겐 더욱 잘살아야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생겼고 그는 그 목표를 향해 밤낮없이 노력했다.
드디어 그는 1969년도에 간장집이라는 채소가게를 창업했다. 그동안 행상을 하며 한푼 두푼 모은 돈과 사채를 끌어 시장 안에 점포를 낸 것이다. 그리고 물건은 모두 도매상으로부터 외상으로 들여놓았다. 그때는 그런 것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런데 채소가게를 창업했으면서 상호가 간장집이라니, 그 연유를 그에게 직접 들어본다.
“내가 인수한 가게가 본래 간장공장 대리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이 가게를 간장집이라고 불렀지요. 물론 나는 채소가게를 할 참이었지만, 가게 이름을 예전 그대로 쓰기로 했어요. 헷갈리지 않고 좋잖아요? 간장이랑 아무 관계없지만 그 이름을 50년 넘게 그냥 써오고 있습니다.”
그는 각종 채소를 싸게 들여와서 팔기 시작했다. 워낙 성실했고 또 열심히 했기 때문에 단골도 생기기 시작하고 장사가 잘 되었다. 많이 팔리다보니 도매도 함께 했으며 사업이 날로 번창하였다. 그는 채소뿐만 아니라 두부, 어묵 등 일반 부식까지 취급하며 품목을 늘려갔다. 70년대 중반에는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화지중앙시장은 내 삶의 터전
간장집은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90년대 중반까지 오랜 호황을 누렸다. 그러다가 90년대 말부터 많은 상권을 대전에 뺏기고 또 공주, 강경, 서천, 부여 등 각 지역마다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급격히 하강 국면을 맞게 된다. 이는 비단 간장집만의 문제가 아니라 논산 화지중앙시장 전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즉 재래시장의 상권이 죽기 시작한 것이다.
대형마트에 손님들을 뺏기기 시작한 화지시장은 다시 상권을 살리기 위해 상인들과 시와 지역주민들이 함께 노력했다. 그래서 2004년도에는 전국최우수전통시장으로 선정되었으며, 2005년도에는 전국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시장 열두 곳에 포함되기도 했다. 또한 시장을 찾는 고객들의 편의를 위해 비를 막을 수 있는 아케이드 시설을 만들었으며, 3곳에 전용주차장(175대)을 완비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용화장실, 쇼핑카트를 구비하여 편안하게 쇼핑을 즐길 수 있으며, 구조개선공동사업장에는 고객지원센터가 있어 고객들을 위한 노래교실과 에어로빅 교실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논산 최대 지역행사인 딸기축제기간에는 할인행사 및 경품행사를 하고 있으며 또 1년에 3~4회 정도는 고객맞이 감사대축제를 열어 지역민들과 함께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 또한 물가안정을 위한 HPD(Happy Price Day)할인행사를 매월 넷째 주 월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66개 점포가 참여하여 자체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시장을 이용하는 고객에게는 무료주차이용권을 나눠주는 등 항상 소비자에게 최상의 장보기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윤수완 옹은 이 시장에서 태어나 행상을 거쳐 간장집을 개업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팔십 평생의 삶을 이 시장과 함께 해오고 있다. 이곳은 그의 삶의 터전이자 삶 그자체이기도 하다.
욕심 없는 그의 건강한 삶
윤수완 옹은 그 연세에 비해 무척 건강하실 뿐더러 십년은 젊게 보인다. 그에게 건강의 비결을 여쭈어보았다. 그러나 그의 답변은 너무나 의외였다.
“건강을 위해 내가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나는 그 흔한 운동도 안 합니다. 약 먹는 것도 아무 것도 없고요. 그저 밥 맛있게 먹는 거 빼고는 내가 건강을 위해 하는 것은 따로 없답니다.”
그는 건강 유지를 위해 특별히 하는 것이나 먹는 것이 없다고 한다. 아침식사로는 아내가 무엇인지 미숫가루 같은 것을 타서 주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솔직히 모르겠다고 한다. 그리고 점심식사는 주로 나가서 매식을 하는데 어떤 음식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잘 먹는다고 한다. 그리고 저녁식사는 아내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다고 한다. 언젠가는 아내가 몰래 보약을 해줬다며 무심하게 말한다.
“아내가 먹고 죽을 거 줬겠어요? 다 좋은 거 줬겠지. 나는 건강해지려고 그걸 먹은 게 아니라 그거 챙겨주는 아내 생각해서 먹었습니다. 난 지금도 그게 뭔지도 몰라요. 대신 나는 평생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약주를 워낙 좋아해서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죠. 그래서 어머니가 술은 입에도 대지 말라고 하셔서 우리 네 형제가 모두 술은 압에도 안댑니다. 담배는 군대에서 조금 피웠는데 제대하면서 담배도 제대했지요.”
자신에게 당뇨가 있는지, 혈압이 높은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은 적도 없고 약이라곤 더더군다나 먹어본 적이 없이 무심하게 사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면 비결이라고 그는 말한다. 2015년도에 우연히 위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았는데, 자신의 혈액형이 A형이란 것도 그때 알았다고 한다. 올해는 딸이 독감예방주사를 꼭 맞으라고 하도 졸라서 병원에 한 번 가보았노라고 말하며, 자신보다는 오히려 뇌졸중으로 두 번이나 쓰러진 아내의 건강 걱정을 더했다.
그는 채소가게 간장집을 하면서 밖으로는 수정건설이라는 상수도설비 공사를 하는 업체를 1981년도부터 운영해오고 있다. 간장집은 3-4년 전에 동생에게 넘겨주고 지금은 이 업체만 운영해오고 있다. 매일 아들뻘 손자뻘 되는 젊은 사람들과 일을 하니 젊어져서 좋고, 건강에도 좋고, 돈도 생기니 좋다고 그는 말한다. 언제까지 일을 더 하실 생각이냐는 질문에 그는 허허 웃으며 ‘죽는 날까지 해야지요.’ 라고 말한다.
시장 후배들에게, 가족에게 남기고 싶은 말
“사람이 살다보면 어려울 때가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그럴 때는 아래 쳐다보고 참고 있으면 반드시 기회가 오지요. 힘들 때 부모 원망하고 남 탓 하고 그러면서 그걸 못 참고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안타까워요. 잘 될 때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안 될 때는 낙심하지 말고 묵묵히 가면 됩니다.”
요즘 옛날 어른들 말씀이 많이 생각난다는 윤수완 옹은 내가 항상 손해보는듯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욕심 안 부리고 한 발 물러설 때 모두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친구들한테 그리고 이웃들한테 욕 안 먹고 사는 게 제일입니다. 한창일 때 친구들과 75세까지 살면 그 다음은 보너스라고 말했는데, 이제 그 친구들 다 가고, 보너스로 사는 친구는 겨우 몇 안 남았어요. 이제 더 바랄 게 뭐가 있나요? 더 있다면 그거야말로 욕심이지요. 나머지 인생은 세월에 올려놓고 그냥 가는 거지요.”
이렇게 마무리하며 윤수완 옹은 환하게 웃었다.
이날 함께 자리 한 화지노인회 전계선(田桂善. 81세) 옹은 윤수완 옹에 대해서 "그는 현재 화지노인회에서 감사직을 맡고 있는데, 빈틈없고 틀림없는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손지영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