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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돈암서원의 진정성, 서원 땅문서에서 찾아내다
이철성(건양대학교, 한국사/충청남도 문화재위원)
기사입력  2020/03/04 [13:17]   놀뫼신문

 

 

세계문화유산 돈암서원의 진정성, 서원 땅문서에서 찾아내다

   

▲ 응도당이 있던 외성리 외성산 자락 숲마을(중앙, 둥글게 되어 있는 논배미)   

 

 

유네스코 등재유산인 돈암서원은 세계문화유산 ‘지정’의 단계를 넘어 진정한 ‘활용’을 모색하는 단계로 진입했다. 등재유산은 단순히 보고 감상하는 유형 문화유산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대체할 수 없는 우리들의 삶과 영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가 세계인류문화유산에 대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증명하고 지역 주민을 비롯한 일반 대중에게 그 가치를 활용할 수 있는 관리를 요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돈암서원을 비롯한 총 9개의 서원 연속유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등재 기준을 충족했다. 서원에서 교육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교육 체계와 유형적 구조물의 창조, 성리학 경전과 연구 수행을 통한 세계에 대한 이해와 이상적 인간형을 만들기 위한 노력, 선현 제향을 통해 강한 학문적 계보 형성, 서원을 기초로 다양한 사회적·정치적 활동 전개 등이, 한국 서원과 서원건축의 특성과 발전을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충족한 것이다. 

 

돈암서원 이건비(移建碑) 

 

하지만 돈암서원은 “16세기 중반부터 약 1세기 기간 동안 건립된 대표적 서원으로서, 역사발전 과정에서 훼철되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였다.”   “조선시대 서원의 필수 공간 요소인 제향공간, 강학공간, 교류와 유식(遊息) 공간을 구성하는 각 건축물뿐만 아니라 원래의 지형, 주변환경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등의 진정성과 완전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다 알다시피 돈암서원(遯巖書院)은 기호유학의 수선지원(首善之院)으로서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서원이었다. 그런데 맨 처음 서원이 세워졌던 곳은 1634년(인조12) 현재의 자리에서 북쪽으로 약 2㎞ 떨어진 논산시 연산면 외성리 외성산 자락 숲마을이었다. ‘범내(虎溪)의 언덕’으로 불리는 현재의 자리인 “연산면 임리 74번지 일원”으로 옮겨온 것은 1880년(고종17)이었다. 

약 250년을 애초의 자리에 있었고, 한 세기 반에 가까운 동안을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원 이건(移建)을 기점으로 옛 돈암서원과 현재 돈암서원의 건물과 배치는 다를 수밖에 없고 원래의 지형, 주변 환경도 다르다. 게다가 응도당은 ‘조선 후기 강당 건축의 전형으로 주자학적 이념을 서원건축에 구현시켰다’고 평가받는다. 이 응도당이 옛 돈암서원 터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무려 91년이 지난 1971년에야 현재 돈암서원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에 강학 공간의 정중앙에 위치하지 못하고 한쪽 측면으로 비켜나 자리잡았다.

돈암서원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도(道)가 지금은 돈암에 있다’고 선언할 정도로 기호유학에서 핵심적 지위에 있는 서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암서원의 이건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미흡했고, 그로 인해 세계 유산으로서의 진정성을 의심을 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돈암서원 이건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이처럼 매우 절박한 과제였음에도 발목을 잡는 절대적인 원인은, 이를 증명할 사료의 부재였다. 서원이건을 언급한 기록은 연재 송병선이 남긴 ‘돈암서원(遯巖書院) 이건비(移建碑)’의 내용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원 이건의 배경이 시냇물이 담장까지 침범해 왔기 때문이라는 세간(世間)의 이야기도 이 기록에서 나온 것이었다. 

  

1880년 이건과 재원확보 문건

 

돈암서원 이건의 배경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이건을 위한 비용은 어떻게 마련했으며, 이건의 준비 과정은 어떠했는지? 이건이 지닌 의미는 무엇인지 등등의 실상은 모두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의외의 자료가 돈암서원 소장의 고문서 속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 자료를 바탕으로 <1880년 논산 돈암서원의 이건과 재원확보>(이철성, 『역사와 담론』88>라는 연구 논문이 공간 되었다. 

논산시와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이 『돈암서원-고문서 기록화 사업 최종보고서』를 출간했는데, 그 안에 『돈암서원(遯巖書院) 전답양안(田畓量案)』, 『원중도지기(院中賭地記)』, 『재임록(齋任錄)』 등의 문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돈암서원 장의(掌儀) 김선의(金善義) 씨의 도움으로 고해상도의 이미지 파일을 제공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문서의 표기 형태 및 부기의 내용을 자세히 살피고 분석할 수 있었다.

 

 

 

 

 

 

쉽게 이야기하면 『돈암서원 전답양안』은 서원 소유의 토지대장이고 『원중도지기』는 토지에서 소작을 받는 내용을 적은 문서인데, 이 두 문서가 돈암서원 이건 전후 시기를 포괄한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 그런데 두 문서 곳곳에는 필지 몇몇을 묶거나 금을 그어 표시하고, 방천(防川) 즉 해당 필지를 하천을 막기 위한 일에 방매(放賣), 매매(賣買), 상환(相換)했다거나 사우(祠宇)의 중수를 위해 방매했다거나, 소청(疏廳)을 올리는 비용으로 매용(賣用)했다는 식의 소유권 변동의 사유가 부기되어 있었다. 

이렇게 토지의 소유권 변동이 부기된 경우는 두 자료를 각기 합해 총 58건이었다. 그 중 1871년(고종8) 사우 중수 때 3건, 서원 이건이 있던 해인 1880년(고종17) 방천(防川)에 대한 사유가 52건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1880년 토지 상환에 대한 인준은 그해 2월 그믐 하루 전날에 재회(齋會)에서 내려졌는데 양안과 도지기의 대상 토지에 유사(有司)의 이름을 적고 서원의 도장을 찍어 증빙했다. 이때 유사의 이름이 송구희(宋龜熙)로 밝혀졌고, 돈암서원 『재임록(齋任錄)』에서 그의 이름을 실제로 찾을 수 있었다.

 

 

  

결국 이 세 자료를 엮어보면 유학(幼學) 송구희(宋龜熙)는 1877년부터 1879년 서원 이건시 제향(祭享)까지 3년간 돈암서원의 유사(有司)를 맡고 있었는데, 서원 이건 3년 전인 1877년부터 유사의 직분으로 돈암서원 전답의 매매, 상환, 대환 등의 사실을 점검하고 서원전의 도지를 일괄 정리하였으며, 서원 이건을 알리는 제향 시에도 역시 유사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재원 마련 방안과 이건 시기 등을 돈암서원 소장 문서에서 밝힐 수 있게 되자 다음에는 이건의 배경으로 관심이 돌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애초 돈암서원의 자연환경과 그 환경에 따른 재난요소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당시의 여러 종류의 토목 공사 방법 등이 역사 자료들을 통해 복원되어야 했다.

조선 시대 고지도와 일제 강점기 지형도 및 지적도를 대비해서 옛 돈암서원의 자연환경을 복원해 보았다. 즉, 옛 돈암서원은 서원 뒤편으로 연산 외성리 외성산이 작은 동산을 이루고, 산 아래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있으며, 앞으로는 길게 뻗쳐 있는 숲이 있었다. 숲 바깥쪽으로는 맑은 시내 즉 사계천이 흘러 거룻배를 띄울 만했다. 그리고 서원 주변에 연꽃을 심은 연못과 잔디가 덮인 수백 걸음의 둑이 있었다. 이처럼 돈암서원은 산, 하천, 연못을 낀 공간으로 ‘인간 본성을 수양’하는데 적합한 장소였으나, 산과 하천을 끼고 있어 장마와 폭우에 따른 다양한 자연재해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 1968년_현 서원지     

 

 

1877년 수재(水災) 우심(尤甚) 판정

 

따라서 다음 단계는 “실제로 서원의 이건을 전후한 30여년 동안 얼마나 많은 장마, 홍수, 산사태 등의 자연재해가 있었던가?”를 밝히는 작업이었다. 홍수는 금강 하구의 논산지역처럼 빗물이 빨리 빠지지 못하는 평원지대나 조류의 영향으로 밀물 때에 바닷물과 상류에서 불어난 빗물이 내려와 맞부딪치는 지역에서 피해가 더 컸다. 연산, 강경, 노성, 석성 등의 피해가 커진 이유이다. 

특히 1874년(고종11)의 상황은 심각했다. 이 해 5월 초순부터 내린 비는 석 달에 걸쳐 2~3일간의 집중 호우의 양상을 띠었다. 그로 인해 5월 17일에는 인근 노성, 석성 등에서 하천과 도랑이 불어나 물이 넘쳤고, 27일에는 연산을 포함한 일대의 강과 하천이 범람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집과 깔려 죽은 인명에 대한 조사도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다. 은진 543호, 노성 52호, 연산 35호의 집이 무너져 내렸다. 은진에서는 2명의 인명 피해도 발생했다. 전답이 쓸려나갔는가 하면 곡식은 뒤집어졌고, 자갈과 돌이 덮쳐버린 땅에서는 곡식 수확이 불가능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강과 바다의 물이 넘쳐나고, 마을이 뿔뿔이 흩어지고, 물에 사람이 빠져 죽고, 가옥이 무너지고, 논밭이 모래와 자갈로 뒤덮이는 재앙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재난을 극복하는 방책은 단기적으로는 집을 다시 세우고, 도로를 내며, 농지에 덮인 흙과 자갈을 거둬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하천을 막고[防川], 둑을 높여 쌓아[防築] 범람에 대비하고, 제언을 보수하여 농토를 확대 유지하고, 도랑을 파 새 물길을 내는[穿渠] 등의 치수(治水) 토목사업이 이루어져야 했다. 이것이 재난 재발 방지를 위한 근본 대책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막대한 인력과 물력이 투입되지 않으면 현실화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돈암서원 이건 3년 전인 1877년(고종14)에도 공주 등 열 고을은 수재(水災)로 풍흉 등급에서 가장 심한 우심(尤甚) 판정받았는데, 바로 이 때가 돈암서원 유사 송구희가 서원전의 도지를 일제히 점검한 해였다. 이 과정에서 송구희는 방천 및 서원 이건에 들어갈 비용을 확보하기 위해, 상환할 땅과 방매할 땅을 재임들과 의논하여 결정하고 일을 추진하였다. 

서원의 이건은 1879년(고종16) 봄 이건에 따른 제향을 지낸 이후 본격화되었으며 1880년 2월 그믐 전날 재회(齋會)에서는 그 동안 토지의 방매 및 상환 사실을 확인하고 「서원도지기」는 물론 「서원양안」에서도 대상지를 삭제 처리하고 날인했다. 이 때 상환 대상 토지는 무려 3결 20부 3속을 넘었으며, 도지 역시 41석 8두 이상을 얻을 수 있는 정도였다. 어마어마한 토지가 방천과 이건을 위해 상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원 이건은 약 1년 안에 어느 정도 끝낸 것으로 보이지만 완전한 마무리는 1880년 9월 추향 때였다고 생각된다. 즉, 서원의 이건은 1877년 서원 토지의 일제 점검을 한 때로부터 1879년 이건이 시작되기까지 3년 이상을 준비해 오면서 착수되었고 1년 여의 시간을 들여 진행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서원 이건은 절박한 사정이 없는 한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서원의 설립 정신과 사상적 정통성에 치명적 결점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엄청난 인력과 물력이 들어가는 역사(役事)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원군의 서원 훼철로 지방 사림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던 시기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평지에 하천을 끼고 있던 서원의 입장에서 보면, 잦은 홍수의 피해와 하천 물길의 변화는 자연환경 및 건축공간을 일시에 바꾸어 버릴 수 있는 존립의 문제였고, 당연히 이건은 그들의 정신적·공간적 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절박한 과제로 떠올랐다. 따라서 돈암서원 이건은 호서 사림의 공감대를 얻어 자발적으로 계획되고 실현되었다. 

연재 송병선은 이를 두고 “연대가 오래됨에 따라 산곡(山谷)이 변하고 물길이 바뀌어 서원의 담장까지 물이 침식하는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림(士林)들이 이것을 늘 걱정하여 금상(今上) 경진년(1880, 고종17)에 다시금 거기에서 남쪽으로 1리 떨어져 있는 호계(虎溪)의 언덕에 터를 잡아 새로 지었다.”고 한 것이다. 

 

 

 

서원훼철 분위기에서 독자 힘으로 완성

 

서원 이건은 대원군의 서원철폐 이후 중앙정부의 재정적 도움을 바랄 수 없는 시절에 이루어졌다. 서원이 가지고 있는 땅을 팔고, 토지를 바꾸어가면서 재원을 마련했다. 그리고 주자 성리학에 입각한 서원의 정신과 건축 양식을 준수하여 서원을 이건하였다. 연재 송병선은 이에 대해 “사우를 지은 제도는 한결같이 옛날의 규모대로 하여 당(堂)과 도(塗)와 문(門)과 숙(塾)을 조금도 차이 나지 않게 하였다. … 아, 간가(間架)는 비록 크고 작은 차이가 있으나 규모는 예전 것과 새 것이 다름이 없다. 이에 태산교옥(泰山喬嶽) 같은 우뚝함이 다시 임하였고, 광풍제월(光風霽月) 같은 맑고 깨끗함을 다시 접하게 되어 그리워하면서 사모하는 마음을 붙일 곳이 있게 되었으니, 아! 기쁘다.”고 술회했다. 즉, 이건된 돈암서원 역시 주자학의 이념을 반영한 서원 건축물로서의 정통성을 그대로 계승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어 그는 ‘이 서원에 들어서고 이 당(堂)에 오르는 자들이 어찌 한갓 선생을 존경하고 드높이는 데 그칠 것인가!’라고 되묻고, ‘장차 여러 선생들이 품었던 마음으로 마음가짐을 하고, 여러 선생들이 썼던 관을 머리에 쓰고, 여러 선생들이 입었던 옷을 몸에 걸치고, 여러 선생들의 책을 강습하고 여러 선생들의 의리를 지켜, 그분들이 평소에 지공무사(至公無私)한 혈성(血誠)으로 지켜왔던 도가 영원히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고 했다. 

요컨대 돈암서원 이건은 자연환경의 위협에 맞닥뜨린 호서 사림이 건물의 규모와 배치는 예제 원칙을 지키는 한편, 서원은 김장생·김집·송시열·송준길이 이룬 예학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당시 어지러운 현실을 바로잡기 위한 실천적 행동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부여했다고 할 수 있다. 

서원 등재에 따른 유네스코의 기준은 이렇게 언급한다. 서원은 “교육을 기초로 형성된 독특한 역사 전통과 성리학의 가치를 나타낸다. 향촌 지식인들은 이 유산을 통해 성리학 교육을 적절하게 수행하기 위한 교육 체계와 건축물을 창조하였으며, 전국에 걸쳐 성리학이 전파되는 데 기여하였다.” 그렇다. 자연재해의 벼랑에 몰린 돈암서원의 정신과 건축물을 살리려는 호서 사림들의 진정정이 무시된다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증명하고 지역 주민을 비롯한 일반 대중에게 그 가치를 활용할 수 있는 문화유산은 앞으로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처럼 돈암서원의 완전성과 진정성에 대한 답은 다른 곳이 아니라 서원이 간직해 온 문적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결국 돈암서원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켜나가는 보존과 활용이라는 앞으로의 과제도 돈암서원 문서의 기초자료 정리가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문화 콘텐츠는 무(無)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유(有)에서 재해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돈암서원을 거쳐 간 인물들이 남긴 전적, 문집, 기문, 목판 등의 기록유산에 대한 학문적 정리와 데이터베이스화, 그에 기반한 유형·무형의 유산을 보존 전승하는 현대적 활용 사업에 온 힘을 다해야 할 시점이다. 

 

▲ 이철성(건양대학교, 한국사/충청남도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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