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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채운면 용화리 박상규 어르신 "논산딸기 전도사, 논산딸기의 대부"
기사입력  2020/02/26 [09:51]   놀뫼신문

[논산딸기 전도사] 

‘논산딸기’의 대부 박·상·규 선생

 

▲ 박상규 어르신 부부     © 놀뫼신문

 

논산 딸기의 대부를 만나기 위해 자택인 채운면 용화리 채운로223길 43 자택을 찾아갔다. 내비는 파란색 지붕에 태양열판을 얹어 놓은 집 앞에서 멈추었다. 마당에 들어섰지만 인기척에도 집안에서 반응이 없어, 잠시 집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당에는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있고 뒤란 쪽에 양은다라이가 옛 모습 그대로 있다. 하얀색 양은다라이는 플라스틱이 나오기 전까지 가볍고 튼튼한 딸기 용기(容器)였다. 양은 다라이는 한 쌍으로 쓰였다. 양은다라이 전부는 그 끝에 2~3군데씩 구멍 나 있었지만, 하나는 바닥에 작은 구멍이 몇 개 뚫려 있었다. 아마도 덮개로 사용했던 것이리라. 집안 문을 두드리니 비로소 손님 온 것을 알아차리고, 반갑게 나와서 맞아주셨다. 

1931년 임신생 잔나비띠, 우리나라로 89살이다. 호적은 늦게 해서 1933년생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부연설명이다. 90세 노인답지 않게 무척 건강한 모습이었다. 몸도 단단하게 단련된 몸이다. 

건강관리, 운동을 위해서 자가용이나 오토바이보다는 자전거를 주로 타고 다니신단다. 몸뿐 아니라 마음도 건강하신 듯 정신도, 기억도 너무 또렷하시다. 요즘은 소일 삼아 책을 읽으러 연무도서관을 1시간씩 자전거로 다니신다고 하셨다. 

 

▲     © 놀뫼신문



▲     © 논산계룡신문



▲     © 놀뫼신문



▲     © 놀뫼신문

 

 

딸기 할머니 눈에 잘 들어서

 

본론으로 들어가,  딸기농사를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또렷한 발음으로 “1967년 36살부터”라고 즉답하셨다. 생생한 기억이었다. 집안 살림이 너무 가난해서 젊은 시절부터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군에 입대해서 5년 정도 복무하고 나와서도 소작농으로 농사지으며 동시에 막노동생활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는 술회가 이어졌다.

운명적인 딸기와의 만남은  바로 1967년 36살 되던 해에 이루어졌다. 지금 부창초등학교 옆 예전 대건중고 있던 자리, 현재 대림아파트 자리에 있는 농지로 막노동 나갔는데, 그 때 딸기 농사짓던 밭으로 일을 가게 된 것이다. 복숭아나무 밑에 심어 놓은 딸기묘목 땅의 평탄작업을 하는 것이었는데,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때 딸기농사를 할머니가 지었는데 품종은 ‘다나’라고, 일본인이 심어서 키우던 것이었다. 

그때 딸기를 심어서 돈을 벌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할머니 밭에서 남은 묘목을 가져다가 심었는데, 딸기 묘목은 번번히 죽어나갔다. 그럴 때마다 다시 할머니를 찾아가서 딸기묘목을 심었지만, 10일 정도는 잘 자라다가 죽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자, 할머니가 부지런하고 건실한 모습을 보면서 “자네는 딸기농사를 할 수 있겠구먼”이라며 재배법을 전수해 주셨다. 그 전수받은 재배법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바로 그 다음해 1968년이다. 

750평의 땅 중에서 500평으로 첫 딸기농사를 시작해서, 첫 수확은 나무상자 1박스였다.  너무나 작은 수확에 허망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딸기가 흙에 묻어서 딸기모양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딸기에 흙이라도 없애서 가게에 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물에 깨끗이 씻고 나무상자에 담아 시장 과일가게로 내보냈다. 마음을 졸이고 아내가 오기를 기다렸다. 아내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와서는 “우리 딸기를 최상품으로 평가해주면서 가격도 가장 높게 쳐주었다”는 말에 둘이서 고무되어 한창을  들떴다. 

1969년 38살 되던 해, 그러니까 딸기농사 첫 수확하고 그 다음해에는 이제부터 딸기농사를 제대로 지어보고 싶다는 마음에 서적을 찾아갔다. 하늘이 도와서인지 마침 책 모양이 아닌 팜플렛으로 된 딸기재배서적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 책에 나온 속성재배와 조기재배법에 새로운 눈이 뜨였다. 그 당시 딸기농사는 4월 중순에 따서 벼심기 전인 6월 전까지 수확이 끝났다. 통상 5월 스승의 날이 지나면 딸기를 시장 상품으로 만들기 어려워져서, 사실상 그때를 수확의 최종시기로 잡았던 시절이다. 

속성, 조기재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서적에 나온 재배법 때문만은 아니었다. 4월 초순에 수확한 딸기가 비쌌고 5~6월로 갈수록 딸기 가격은 떨어졌기 때문에 4월초에 수확하는 속성재배 수입이 휠씬 좋았던 것도 큰 이유였다. 속성조기재배를 대구상회 주인에게 얘기했더니 극구 말렸다. 그 이유는 주변에서 실패 사례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변 만류에도 불구하고 속성재배를 감행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해 4월 20일 섭씨 2도로 내려가는 서리가 내려서 딸기묘목일 얼고 화방이 까매져서 수확을 하나도 못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1차는 그렇게 망했지만, 2차 화방에서는 수확을 해서 위기를 넘길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서울로 진출하게 된 논산 딸기

 

“그럼 딸기 서울 판매는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는지?”질문을 이어갔다. 

군시절 복무했던 부대가 철도수송대였다고 하시면서, 철도 수화물 유통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게 계기가 되었다고 하신다. 

그것 말고 서울로 판로개척을 하게 된 데에는 배경이 있었다.  딸기농사를 하면서 작약(꽃) 농사를 함께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60~70년대는 춘궁기를 겪으면서 먹고 살기 고달픈 시절이었다. 멀쩡한 땅에 보리 같은 곡물 대신에 돈푼깨나 있는 부자의 기호식품 딸기를 심는다는 것은, 나라에서나 이웃에서 용인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당시 작약이 약용식물로서 호평이어서 서울에다 내다팔면 돈이 되었다. 작약 밭 사이사이에 딸기를 심어서 논산시내 과일가게에 팔았다. 그런데 수확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논산으로만 판로가 부족해서 서대문시장쪽으로 무작정 진출하여 판매를 시작했다. 마침 작약재배 농가가 급증하면서 작약값이 급하락하던 타이밍이었다. 

서대문시장 삼육상회에 내다판 딸기는 4상자(1관)를 5번씩 20상자를 보냈다. 그리고 5일 정도 지나 서울로 올라가 대금을 받으러가면 과일상회주인이 자신들에게 돈 벌게 해준 귀한 손님이라고 식사대접을 융숭하게 해주었다.

그해 농촌지도소에서 딸기밭을 방문해 딸기재배에 대해 조사를 한 다음에는 채운면 지도사로 임명해주었다. 이어 농촌지도자 회의에 참석하여서 딸기 재배법을 발표하였다. 그 결과 채운면 일대에 딸기농사를 짓는 농가들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한 아내와 약속을 하기를 “딸기 소득으로 200만원을 넘기면 이웃들에게 묘목을 나누어주자”고 했는데, 마침 그해에 딸기소득이 190만원을 넘어섰다. 기분이 좋아져서 주변이웃에게 묘목을 무상으로 나누어주면서 재배법도 알려주었다. 그때 알려준 딸기재배법은, 딸기묘목을 장마철에 1m 간격을 띄워서 묻어두라는 것이었다. 

딸기의 속성을 이용한 재배법이었다. 딸기는 물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물을 싫어하기도 하기 때문에 장마철에 심되, 배수가 잘 되도록 해주어 1m쯤 간격을 유지해주는 것이 재배의 비결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알려준 대로 딸기 농사를 지은 가구들은 딸기 수확이 모두 좋았다. 

1970년 39세때 딸기농사 출하량이 4톤 트럭 4~5대정도로 되어, 서대문시장 딸기의 90%이상을 논산지역에서 공급한 수량이 되었다.  경남 삼량진에서도 올라왔지만, 거기는 1가구당 4~7상자 정도로 10가구가 모여도 40~70상자뿐 되지 않았으니 서울 청과상은 논산딸기천하였다. 

 

연작피해극복, 딸기전도사로 우뚝

 

1971년 40세 때에는 보령 웅천에서 새로운 품종인 ‘보교조생’ 재배를 하였다. 맛이 좋아서 비싸게 판매가 되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해서 그 품종으로 다시 딸기 농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품종의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연작피해가 생기는 것이다. 그 해결책이 이식재배 방식이었다. 그 품종은 매년 땅을 옮겨가며 심는 것인데. 최대 5번씩 땅을 옮기면서 딸기 농사를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연작하여서 손해를 보았다. 

1974년 43세 때는 최고 전성기 시대였다. 하우스 2천평에 딸기 재배를 하여서 300~400만원의 소득을 올렸던 것이다. 그 당시 논 5마가지를 살 수 있는 액수였고, 채운에 있는 양조장집보다 더 소득이 높다고 할 정도였다. 

1975년 44세 때는 농촌지도사로 논산지역의 순회강사로 활동을 하였다. 양촌면에서의 교육을 5회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수강생이 교실 4개반을 합쳐 300~400명 모여 90~120분 교육하였다. 이후에는 상월에서 3회 정도, 연산에서도 교육을 이어갔다. 돌아보니 지금도 자랑스러운 것은, 그렇게 교육하고 나오면 곧바로 딸기단지가 조성되었다는 딸기붐이다.  

1967년부터 시작하여 1975년까지 8년 동안 딸기농사를 확산시킨 재배법이 알려지면서 다른 시·도에서 선진지 견학프로그램으로 방문 버스가 쇄도하였다. 그 교육이 부지기수로 많았다.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아서, 관공서에서 수여받은 상도 숱하다. 특히나 기억에 남고 책으로도 남은 게 몇 있다. 하나는 경상대학 원예학과 교수가 딸기농사와 재배법에 대한 논문을 쓰면서, 그 원류가 논산에 있다는 것을 알고 논산 농촌지도소에서 연결해서 그동안의 딸기 재배법을 소개해준 것이다. 또하나는 건양대학에서 딸기 농사와 재배법의 자료집 발간에 인터뷰하였고, 그게 책으로 나온 게 가장 뜻깊은 업적이 되었다. 

그렇게 16년을 더 딸기와 인연을 이어가다가, 환갑이 되던 60세, 1991년을 끝으로 딸기농사를 그만두었다. “그때는 60세 환갑이 되어서 너무 나이가 많이 먹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 30년을 더 살고 있다고 환하게 웃어 보이신다. “자식들이 모두 나라와 기업에 큰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 그것으로도 만족스럽다”고 술회하신다. 그 모습에서 논산, 아니 대한민국 딸기의 품종개량과 재배기술이 바로 박상규 옹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키워진다. 

 

- 성수용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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