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병현 미래인재역량개발연구소 대표 ©놀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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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우단(veludo)같은 잔디, 살갗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바람, 흰 구름 두둥실, 대명천지 남태평양의 하와이 섬, 도심 한복판 ‘Aala 공원’이다. 흰 피부를 가진 늙지 않은 여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하늘을 향해 두 팔과 두발을 쩍 벌리고, 육체의 원초적 동물성을 재연하듯 연신 허우적거린다. 거리는 이 모습에 익숙한 듯 무표정하다. 나는 갑자기 멀미를 느꼈다. 어지럽다. 일행들의 헤픈 농지거리에도 역겨움을 참아내기가 힘들다. 마약 때문이라는 설명에도 구역질을 피할 수 없었다.
일상은 실오라기조차 힘겹다
차라리 햇볕에 부서지는 알몸
난도질 된 희망
퍼덕이는 아득한 꿈
Paradise Hawai
아름다운 욕망은
빛이었을까?
꿈이었을까?
마약은 행복으로 직진한다.
하늘향한 배설
허적허적 게워내는 환희”
<욕망의 덫>
차라리 빈곤으로 굶주리고 생존이 위협받는 동남아의 가난한 국가나 아프리카 어느 여행지에서 이러한 광경을 목격했다면 이렇게 메스껍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민의 감정으로 몇 푼의 알량한 지폐라도 꺼내었을지 모를 일이다.
하와이는 자타가 공인하듯 축복받은 아름다운 땅이다. 또 세계에서 최고의 풍요와 문명을 자랑하는 나라의 도시다. 그러나 도시 곳곳에서 노숙자(露宿者)를 목격할 수 있다. 최소한 얼어 죽을 걱정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와이키키 해변의 풍요와 들개처럼 쓰레기통을 뒤지는 군상(群像)들의 딜레마(Dilemma)
사람이 누리는 행복과 환경의 상관관계는 어느 정도일까? 환경적 요인을 아무리 후하게 쳐도 행복의 충분조건은 될 수는 없다. 풍요로운 환경이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조차 보장해 주지 않는다. 오직 자기의 삶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게으름과 온갖 유혹과 고통을 이겨낸 용기와 노력의 결과로 존재할 뿐이다.
얼마 전 집 근처 대학교에서 수채화와 심리학 통합강의를 수강했다. 캔버스 한 장에, 마음이 가장 평화롭고 행복할 때부터, 마침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발할 때까지 5단계로 구분하여 색칠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분노가 폭발했을 때의 상태는 붉은색, 마음이 우울할 때는 암갈색, 평화와 행복을 느낄 때는 연두색으로 칠했다. 그리고 내 마음이 변화되는 원인을 적었다.
뜻대로 일이 잘 풀리고 가정이나 직장에 아무런 장애가 없을 때는 평화롭고 행복했다.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 주지 않거나, 내 말을 경청하지 않았을 때 짜증이 났다. 뻔뻔한 거짓말을 태연히 하거나, 자기주장만 강요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진심을 오해하거나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우울하였다. 변명만 늘어놓거나, 나를 무시하고 놀린다고 생각할 때 분노가 폭발했다.
하찮고 작은 것들로 내 마음의 평온은 너무 쉽게 깨졌다. 더구나 그 단초(端初)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가까운 가족, 친구, 동료, 친척과 이웃이었다. 그들에게서 내가 받은 고통, 또 내가 주었거나, 받았던 뼈아픈 말들이 송곳처럼 내 마음의 구석구석을 찌른다. 그들이 내 마음을 할퀴고 상처를 냈다. 나도 그들의 마음에 큰 생채기를 내어 돌려주었다.
내 마음의 불안과 우울함, 슬픔과 분노의 원인과 상대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들의 태도에 따라 내 마음의 상태가 수시로 변한다. 나는 그들의 꼭두각시이고 종속변수다. 그들이 내 행복을 좌지우지한다.
언제부터인가 내 자신 스스로가 주재하는 내 삶이 없어져 버렸다. ‘내 마음의 평화와 분노의 모든 것이 타자에 의해 결정되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의 자랑과 부끄러움, 기쁨과 슬픔, 불안과 고통, 감동 그리고 꿈조차도 모두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껍데기에 불과했다. 나 스스로를 성찰하고 내 마음밭조차 스스로 가꾸지 못하는 허깨비 같은 생각이 들었다.
원효는 당나라로 불법을 구하러 가다가, 캄캄한 밤에 감로수 한 바가지를 먹었다. 이튿날 아침 해골바가지에 괴인 물인 것을 알고, 모든 일이 한갓 마음의 작용(一切唯心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남의 탓을 하고 살아온 꼴을 생각하니, 갑자기 해골에 고인 썩은 물 먹고 똥물까지 게워낸 원효스님이 생각난다.
인생은 눈에 보이는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적과 싸우는 것이다. 이제야 내 마음에 숨어 있던 내면의 적 하나를 찾아낸 셈이다. 나 같은 범인(凡人)은 “내 탓, 네 덕(德) 질하는 참 자유인(自由人)”이 되기 어렵다. 하물며 무애(无涯)의 경지는 언감생심이다. 다만 새해에는 크고 작은 세상일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과, 누구를 원망하는 원귀(寃鬼) 신세만 면할 수 있어도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