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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항월3리 이무행 님 "시아버지 남길우(南吉祐), 광복군으로 활약했건만..."
기사입력  2019/11/06 [11:19]   놀뫼신문

항월3리 이무행 님의 인생노트 

시아버지 남길우(南吉祐), 광복군으로 활약했건만...

 

 

  이 무 행  

  • 1939년 노성면 구암리에서 태어남
  • 1959년 결혼(21세)
  • 1986년 남편과 사별(47세)
  • 1989년 담배농사 후, 힘든 공장생활 시작(50세~)
  • 현재 항월리에서 조용히 살고 있음(80세)

 

기자님, 기자님은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 아닌가요? 텔레비전에서 보면 기자님들은 용감하고 뭐든지 사건을 잘 해결해주잖아요. 제가 이제 나이 여든이 되어보니 바라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죽기 전에 꼭 이것만큼은 해놓고 죽어야 제 남편에게도 미안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인생노트 취재에도 하겠다고 응한 것이었어요. “기자님, 제 인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팔순 나의 소원은 단 하나. 독립운동하신 시아버지가 독립유공자가 되는 거예요. 저 좀 도와주세요. 우리 시아버님이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셨는데도 아직도 우리 가족은 유공자가족이 아니에요.

 

 

동아일보에 나온 시아버지 이름

 

시아버님 얼굴은 못 봤어요. 29살까지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셨어요. 남편은 3형제 중에 첫째였어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장으로 열심히 살아야 했죠. 그러면서도 한편 아버지가 독립 운동가였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어요. 그렇게 가장으로 담배농사 지으며 돈벌이에 힘쓰면서도 아버지 유공자 만들려고 뛰어다니다가, 우리 남편은 젊은 48살에 뇌출혈로 죽었어요.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얼마 전 둘째 시동생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의 명예를 꼭 밝히겠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다가 서류에서 뭐가 안 된다고 자꾸 그러니까 충격으로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이제 저 하나 남았어요. 작은 아버지 이제 81세신데 그 분과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에요, 

36년 전에 ‘최용덕’이라는 독립운동가가 우리 가족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우리 시아버님이 독립운동가라는 것을 알려주는 편지였어요. 시아버님이 신문에 난 것까지 우리가 모두 서류로 가지고 있어요. 이제 이것 한 부 남아있어요. 이번에는 꼭 돼야 해요.

우리가 죽고 나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어요? 우리 다음대의 아이들이 뭘 알아서 이걸 하겠어요? 시아버지의 명예도 찾아주고 싶고, 우리 남편과 시동생의 억울함도 모두 풀어주고 싶어요. 우리는 가족으로서 다른 것을 바라는 게 하나도 없어요. 억울한 삶과 죽음의 명예를 되찾고 싶은 거에요.

 

 

노성면 구암리에서 태어나

 

저는 노성면 구암리의 8남매 중에 넷째였어요. 위로 오빠 둘, 언니 하나가 있었지요. 21살에 시어머님이 선보러 오시고, 우리 아버지가 가서 남편감 선을 보고, 그렇게 중매로 얼굴도 모르고 결혼했어요. 사진 찍은 게 다에요. 그 작은 손바닥만한 사진이 어디 있을 건데?.....

시집을 와보니 시할머니, 시할아버지, 시어머니, 시아버지는 독립 운동하러 가셔서 안 계시고, 남편, 시동생 둘. 게다가 남편과 나이가 같은 작은아버지가 계셨는데, 제가 시집오자 그 분은 군대를 들어가셨어요. 

이런 대가족을 모시고 밥하고 빨래하고 담배농사 지으며 일꾼들 밥까지 하루 5끼를 하며 6남매 키웠어요. 정말 힘들었죠. 우리 시대 사람들은 다 똑같아요. 아마 다들 저처럼 힘들게 살았을 거예요. 결혼 3년 만에 작은 아버지가 제대 후 결혼해서 왕전으로 시할머니와 시할아버지를 모시고 분가를 하기는 했어도, 얼마 남지도 않는 담배농사 지으며 6남매 키우는 게 참 힘들었어요.

 

담배농사 짓다가 맞은 사별, 그리고...

 

6남매를 한창 키울 때에요. 담배농사를 기계로 짓기는 했지만 그해 그해 힘들었죠. 담배농사 일은 다 내가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남편이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겠다고 서류를 해서 서울을 다니고, 돌아와서 이장 일 보고 트랙터 몰고 담배농사 짓고 그랬는데, 그러던 어느 날 쓰러졌어요. 뇌출혈이래요. 쓰러진지 이틀도 안 되어 그렇게 세상을 떠났어요. 그렇게 황망하게 떠나고 나니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농사고, 은행돈관리고 뭐고 남편이 다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떠나다니요~~

큰아들은 군대에 있고 막내아들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예요. 남편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떠나고 남은 건 빚뿐이었어요. 47살에 혼자가 되니 그 막막함이란 정말 지금 생각해도 힘드네요. 그 때 친정오빠가 와서 말했어요. “다른 거 할 생각하지 말고 지금까지 하던 담배 농사를 딱 3년만 더 짓거라.”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그 당시에 젊으니까 뭐 다른 생각을 하거나 바람이 나거나 그런 것을 걱정했던 듯해요. 

남편 대신 담배 농사를 지었지만 빚도 많고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오죽하면 수입이 모자라 한 겨울에 논산 시내 육간집(고깃집)에 가서 한 달간 밥해 주는 일도 했는데, 그 당시는 참 돈이 쌌어요. 한달간 그렇게 일하고 돌아올 때 그 돈으로 동그란 상 하나를 사올 수 있었답니다. 그 상을 작년까지 30년을 썼어요. 작년에 상을 바꿨어요. 

아무리 열심히 발버둥 쳐도 빚은 갚아지지 않고, 나는 급해서 여동생네 찾아가 그 남편에게 300만원을 빌려서 1할 5부 이자로 갚아가며 살았어요. 이렇게 저렇게 17년간 농자금 200만원을 매해 빌렸습니다. 매해 얻어다 쓰고 12월에 갚는 것을 무려 17년이나 했어요. 정말 6남매 먹이고 키우는 게 고되었지요. 

 

허리 다쳐 공장으로, 식당으로

 

우리 나이 사람들은 다 고생했어요. 그렇게 군납으로 3년간 담배농사 짓는 동안 허리를 다쳐서 여태 제대로 펴지 못해요. 이제 담배농사 더는 힘들어서 안 되겠다 싶을 때 이웃 언니가 알려줘서 항월리 박스공장을 다녔어요. 박스공장 3년, 포장공장 2년, 눈다리 벽돌공장 다니고, 천안에 있는 식당도 다니고, 휴게소 3년, 논산식당 , 나중에는 딸기 따는 일도 10년 했어요. 안 해본 일 없이 다 해본 것 같아요. 

그 와중에 큰아들이 결혼해서 애들을 낳았는데 며느리가 아픈 거예요. 우리 큰며느리 강직성 척수염에 좋다는 개소주, 고양이 등등 퍼다 나르고, 나중에는 아들이 부탁해서 아들네 집 가서 아픈 며느리 대신 손주들 밥도 해주고 그랬어요. 서울에서 그렇게 지내면서도 한 해 8번 있는 제사는 또 내려와서 지내야 했지요. 왜 그렇게 일이 많은지? 어떻게 세월이 갔는지 모르겠어요.

 

 

20년전 환갑사진만 남았지만

 

집에 걸어놓은 사진은 없어요. 내가 마지막으로 가족사진을 찍은 게 20년 전 환갑 때였어요. 그 사진 보여줄게요. 우리 딸 넷과 아들 둘. 이때는 큰아들이 살아 있었네요. 우리 큰아들도 40대에 장암이 간암으로 전이되어 일찍 세상을 떴어요. 며느리가 지금은 병이 나아 직장생활을 한다고 해요. 

큰 딸은 서울에서 남매 낳고 살고 있고, 큰아들은 그렇게 가고 며느리가 삼남매를 키우고 있고, 셋째는 딸인데 김천에서 4남매를 낳아 살고, 다들 먹고 살기 바쁘니까요. 다들 자기 자리에서 애들 낳아 잘 살고 있으니 이제 큰 걱정은 없어요.

기자 선생님, 제가 바라는 소원은 단 하나에요. 우리 시아버님이 국가 유공자가 되어서 자손들도 명예를 받는 거예요. 내가 한평생 이렇게 힘들게 산 거는 아무래도 괜찮아요. 하지만 우리 자식들에게 그 명예는 꼭 받아주고 싶어요. 기자선생님, 제 부탁 들어주실 거지요?

 

 


한글강사 전정숙 선생님의 귀띔 하나

 

우리 이무행 어머님은 대단하신 분이에요. 연세에 비해 총명하시고 그림 솜씨도 좋으시고, 베푸시려는 마음도 많으세요. 지난 학기 간식도 이 분이 많이 내셨는데 늘 배포 있고 자연스럽게 많이도 베푸셨어요. 그래서 그런지 동네에서도 대인관계가 굉장히 좋으세요. 지난 아드님 결혼 후에도 동네 분들에게 많이 베푸시고, 그리고 이야기 나올 때마다 외국인 막내 며느리 칭찬을 하신답니다. 며느리를 아끼는 마음이 많이 느껴져요. 이런 어머님을 보면서 “아 이렇게 나이 들어야 하는 거구나” 많이 느낍니다. 지난 번 항월리 이영순 어르신도 신문에 난 것을 코팅해드렸어요. 이무행 어머니도 이번 신문에 나면, 그렇게 크게 해서 드리고 싶어요^ 

 


-  최해선(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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