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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성동면 원남리 오세연 님 "장하다! 그래도 내가 잘 살아왔구나!"
기사입력  2019/07/24 [09:53]   놀뫼신문

성동면 원남리 오세연 님의 인생노트

장하다! 그래도 내가 잘 살아왔구나!

 

▲ 오세연 어르신     © 놀뫼신문



  오세연  

  • 1939년 5월 26일 성동면 원봉리에서 출생
  • 1962년 23세 결혼
  • 1963년 첫째아들 출산 
  • 1978년 늦둥이 막내아들 출산
  • 1992년 12월 20일 남편과 사별

 

 

“살맛난다 내 인생” 2018년 한글대학 졸업식 때 화면에 크게 보이는 글자가 바로 “선생님! 바로 내 인생을 말하는 것 같았당게~~~”

어느 날 일하다 어지러워 쓰러졌다. 한참을 땅에 엎드려 있었던 것 같은데 내 귀에 “일어나, 일어나, 얼른 일어나!” 라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다친 곳 없이 멀쩡하게 일어났다

아직도 남편이 나를 지켜주면서 도와주고 있다고 믿는다. 난 남편 덕에, 아들 5형제 덕에 ‘살맛나는 내 인생’을 살고 있다

 

아들 원하신 아버지, 아들만 낳은 장녀

 

나는 1939년 5월 26일 논산시 성동면 원봉리에서 아버지 오봉환, 어머님 이봉림 사이에 4형제 중 첫째 딸로 태어나다

친정아버지는 막걸리를 너무 좋아해서 술에 취하시면 길거리 아무 곳에서나 그냥 주무시곤 하셨다. 술이 깨어나서야 집으로 돌아오시곤 하셨다. 왜 그리 술을 많이 마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어릴 적 기억들 때문에 많이 속상했다. 

친정아버지는 아들을 무척 원하셨는데, 딸만 셋이나 되고 보니 한이 맺히셔서 그렇게 술을 많이 드신 게 아닌가 싶다. 그때는 아들이 없어서 동네 분들에게도 서러움을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당시 아버지와 같이 술을 많이 드시던 친구 분도 자식이 없는 분이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고 어머니는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막내 동생은 엄마 젖도 못 먹고 동냥젖으로 키웠다. 엄마 돌아가시고 상여 나갈 때 막내 남동생이 3번이나 까무러치며 그렇게 엄마를 보냈다. 그 후 아버지는 재혼을 하셨다.  

평소 아버지는 마음이 너무 좋으셔서 화내신 적도 별로 없고, 술을 드셔도 주사가 전혀 없어 식구들 누구도 괴롭히지 않았으며 얌전히 잠만 주무셨다. 아버지한테 혼난 기억도 없다.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가 불쌍해 보였다. 아들이 그렇게 좋을까? 그래서 난 결혼하면 꼭 아들을 낳을 거라고 다짐했다. 

결혼하고 아들 셋을 낳은 후, 딸을 낳고 싶어서 약간 터울을 두어 넷째를 낳고 보니 또 아들이었다. 병원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그때 간호사가 “아들 낳고 우는 분은 처음 봤다”고 할 정도로 딸을 낳고 싶었다. 그 뒤로 또 아들을 낳았다. 아들만 다섯이다. 

 

▲ 결혼전 아가씨적     © 놀뫼신문

 

▲ 남편대학졸업식때     © 놀뫼신문

 

▲ 약혼사진     © 놀뫼신문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던 김종근 선생님

 

어릴 때는 유난히 큰딸을 예뻐하셨던 어머니의 지극정성으로 큰 어려움 없이 호강하면서 자랐다.

그 당시에는 딸만 셋이었던 아버지께서 아들을 많이 원하셨기 때문에 어머니의 관심을 한 몸에 받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해방되고 나서 9살이 되던 해에 성동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에 다니면서 6년 내내 반장을 도맡아서 할 정도로 공부도 잘하였고 선생님들께 귀여움도 독차지하였다. 

그 당시는 여자에게 공부를 시킨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던 시대라 6학년 담임 선생님이셨던 김종근 선생님께서 부모님을 설득하여 기민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김종근 선생님의 은혜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제주도를 한번 가자는 말을 얼마나 기대했는지 약속이 이뤄지지 못했지만 제주도 이야기만 나오면 김종근 선생님이 떠오른다. 

중학교 졸업 후 논산에 있는 양재학원을 다녔다. 그 당시 인기가 너무 좋아서 뭇 남학생들로부터 편지가 쌓일 정도였다. 특히 공주 사범대에 다니던 학생으로부터 인기가 좋았다. 편지를 주고 갈 정도로 나를 맘에 두고 있었지만, 나는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 동네에서는 혼사말도 종종 오가고 했다. 

 

 논 팔아서 시집을 보냈으나 

 

23세 되던 해에 앞집 사시는 분의 소개로 상견례 장에서 처음 남편을 보았다. 당시 남편은 공부만 해서 그런지 건강이 약해 보였다. 한 눈에 반할 스타일은 아니었다. (당시 기민 중학교 때 수덕사로 놀러갔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스님이 여학생들에게 재미삼아 앞으로 인생의 짝과 어찌될지 알려주셨는데, 남편 될 사람이 오래 살지 못 할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이 사실이 되었다.)

그렇지만 친정어머님이 예비 사위를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적극적으로 딸의 혼사를 밀어붙여서 평생의 동반자를 그렇게 만나게 되었다.

친정아버지는 그리 탐탁해하지 않으셨지만, 친정어머니는 그 당시 논3마지기를 팔아서 딸의 혼사에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이 해주실 정도로 큰 딸에 대한 사랑이 남 달랐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 중에 부뚜막에 삭힌 쩜장에 무청을 소금만 버무리고 고춧가루 살짝 뿌려 버무려 담은 무김치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남편이 파평 윤씨 가문에 큰 아들로 태어나, 종부로서의 삶이 만만치 않았다. 시집와서 보니 1년에 제사만 15번이고, 18명 이상의 집안 어르신과 식구들이 모이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있어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그 일을 혼자 다 해냈다. 

얼굴도 못 뵙고 일찍 돌아가셨지만, 시아버님은 일본에서 유학을 하여 졸업을 할 정도로 그 당시 배움이 크셨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께서는 종손인 남편을 가르치기 위해 논을 팔아서 공부를 시킬 정도로  손주 사랑이 크셨다고 한다.

교육자 집안이어서 그런지 시댁 형제들 간의 우애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시어머님도 좋으셔서 남들 다 겪는 시집살이도 하지 않았으니 내 인생은 복 받은 인생이다.

 

 

▲ 새집짓고나서     © 놀뫼신문



퇴근후 집안살림까지 챙겨주던 생물교사

 

남편은 그 당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대건고등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치셨다. 집안의 각종 대소사는 물론 집안 살림까지도 챙기실 정도로 자상하셨다. 나중엔 논산에 집도 한 채 마련하실 정도로 절약하고 부지런하셨다. 

친정어머니가 남편을 유난히 예뻐해서 그런지 몰라도 종가집 대가족 살림 돌보느라 친정집은 가 보지도 못했는데 남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친정을 챙겼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초등학교 다니던 어린 막내 남동생을 돌보아 주었다. 나보다 장모님이 더 좋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대건고등학교에 교편생활을 하다가 양촌중고등학교로 발령이 나서 양촌에 잠깐 살았다. 양촌중고등학교에서는 교감선생님으로 근무하셨는데 혈압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퇴직하고 그때부터 투병 생활이 시작되었다. 

큰 아들 결혼을 서둘러 시켰다. 손녀딸 하나를 보고 돌아가셨는데 상여 나갈 때 큰 며느리가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며느리에게 아직까지도 고마운 마음이 든다.

막내아들이 중학교 다닐 때, 우리 부부의 이 세상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그래도 다섯 아들이 다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으셨다. 

 

▲ 가족여행     © 놀뫼신문

 

▲ 성동면장님께 백일장상장받을때     © 놀뫼신문

 

▲ 한글대학 졸업식     © 놀뫼신문

 

 

목숨 걸고 오형제 키워놨더니...

 

남편과 사별하고 나서부터 일을 하기 시작했다.

강경에 있는 태창 메리야스에 다닐 때 다리에 피부암에 걸려 1차 수술을 해서 다 나은 줄 알았는데 다시 재발하고 또 재발해서 3번이나 수술을 받았다.

그 후에 연무대 닭 공장도 다니고, 등화동 내복공장도 다녔다. 한번은 배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 보니 “맹장이 터져 위험하다”고 하여 대전 선병원으로 옮겨서 수술을 하였다. 회복도 되지 않은 채 일주일 만에 회사에 출근하였다. 혹시라도 그만 나오라고 할까봐 몸도 돌보지 않고 정신없이 일만 했다.

얼마 지난 후 배에 덩어리가 만져지며 불러오기에 혹시라도 암이 아닐까 검사해보니 맹장 수술한 부위가 속에서 터졌다고 하여 다시 재수술까지 했다. 다행히 젊어서 이겨낼 수 있었고 자식들 키우느라 다른 여념이 없었다.

70대부터는 동네 수박 하우스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살아오면서 다섯 아들 결혼시키고, 아이들 집 장만할 때 도와줄 수 있었다. 남편 보내고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내 자신이 장하다. 다섯 아들 다 자리잡아 첫째 아들은 공무원, 둘째와 셋째는 건설회사 다니고, 넷째 아들도 공무원이며, 다섯째는 미국에서 박사 학위받고 미국에서 근무 중이다

넷째 낳을 때 딸 낳고 싶었던 내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넷째 며느리가 딸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팔순 잔치 때 아들 친구들이 어찌나 잘 놀아주는지, 그래도 “내가 잘 살아왔구나!” 그렇게 느꼈다. 앞으로 더 이상 기쁜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 한글대학이 생겼다. 노래도 부르고 게임도 하고 색종이도 접고 영어도 배우고 어찌나 좋은지 선생님 권유로 일기도 쓴다.   

80세 넘어 내 인생에 또 한 번 살맛나는 기회가 왔다.

 


이선희(한글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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