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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은진면 교촌리 김종학(金鍾鶴) 님 "거지를 사랑채로 들이셨던 선친 본받아 "
기사입력  2019/07/17 [15:23]   놀뫼신문

은진면 교촌리 김종학(金鍾鶴) 님의 인생노트

"거지를 사랑채로 들이셨던 선친 본받아 "

 

▲     © 놀뫼신문

 

 김종학(金鍾鶴) 

  • 1939년 경북구미 선산에서 출생
  • 1947년 논산 연무대로 이사(9살)
  • 1969년 조태순 여사와 결혼(2남 2녀)
  • 2019년 한글대학 입학

 

김종학 어르신(79세)은 구리빛 환한 얼굴에 건강하게 마른 체형이지만 조금 구부정한 모습이다. “작년 가을에 고추밭에다 마늘을 심는다고 로터리 치다가 땅이 야무니까 확 뒤로 넘어져서 허리를 다쳤어. 뼈가 금이 가서 그걸 째지 않고 주사기처럼 생긴 걸로 약을 넣는데, 그 의사 말이 공구리한다고.... 2개월은 낫는 것 같더니 지금은 또 아파가지고 바짝 구부려 다니고 지팡이 짚고 다녀, 다시 병원 가보려고.”

“내가 허리는 아파도 일은 여전히 해야 하니까. 일을 하고 나면 몸이 굉장히 부대껴 밥도 못 먹고 밥만 쳐다보면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 막내아들이 쫓아왔어. 큰 병원에 가서 해봤는데, ‘몸이 탈진되어서 그렇지 다른 병은 없고 폐가 좀 나쁘니 담배는 절대 피면 안 된다’ 그러더군. 담배 생각나면, 과자를 먹어, 아내가 사다주지.”

올해부터 시작한 한글대학에서 건강운동으로 체조를 배우니 너무 좋아서 열심히 나간다. “경로당에서 글을 배우지, 1주일에 2번씩. ‘닭’을 쓰려면 ㄱ 먼저 써야 하는지, ㄹ 먼저인지, 밑에 토다는 것 그것이 섯갈려. 선생님이 실내 운동도 가르쳐주는데, 솔직히 공부하러 다니는 것보다 그게 더 좋아. 허리가 아프니까 좌우로 틀고.”

 

부자집 쌀 나눠주다 좌익으로 몰려

 

김종학 어르신은 1939년 경북구미 선산에서 아버지 김상배 씨와 어머니 이복순 씨 사이의 3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호적에는 늦어서 40년생이 되었어. 내 고향 구미는 장터도 쬐간하고 그랬는데, 박대통령이 하면서 시가 되고, 선산군이 없어지고 읍이 되어 버린 거야.” 할아버지 대까지는 구미선산에서도 부유한 집안이었다. 증조할아버지가 당나귀를 타고 마을을 다니셨고, 증조할머니가 몸종을 데리고 시집을 오셨다. 할아버지도 공부도 많이 하셨는데 할머니도 세 명이나 있었다. 

6살 때 해방이 되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경찰이지, 그 사람들이 말 타고 오면 동네사람들이 무서워서 한쪽으로 도망가고 그랬어. 동네에서 막 해방되었다고 소를 잡아가지고, 모여서 잔치를 벌이기도 했어.” 동네에는 ‘십리안쪽으로 남의 땅 안 밟고 다닌다’는 부자인 윤씨집안 사람들이 있었는데, 새벽이면 부자집에서 당나귀 우는 소리가 쩌렁쩌렁 들렸다고 한다.

 부친은 똑똑하고 언변 좋고 기운까지 세어서 동네 싸움 나면 해결사였다. 동네 사람들 중에는 일본에 갔다 온 사람들도 있었고, 아무 것도 없어서 끼니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빈부격차가 심하였다. “당신네들은 도지 받아 잔뜩 싸놓고 사는데, 끼니꺼리가 없어 굶고 사는 사람들 많으니 저녁 먹게 쌀 좀 내놓으시오.” 이런 일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할 처지에 놓였다. “아버지는 좌익사상을 가진 게 아니라, 있는 사람 뜯어다가 없는 사람에게 주고, 그게 좌익이라고 몰려서 고향을 떠나게 된 거야.”

 

 

▲ 부모 초상화     © 놀뫼신문

 

9살 고향 떠나 정착한 연무대 이재민촌

 

1948년, 내가 국민학교 3학년 올라갈 때 이사를 갔다. 강경 근처 익산 망성에 ‘영남촌’이 있었다. 강경에서 택시를 타서 기사에게 ‘영남촌 가자’고 하면 데려다 줄 정도로 알아주는 동네였다. 일제사람들이 남기고 간 개간지여서, 경상도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동네를 만들고 살게 된 것이다. 아버지도 처음에는 고향의 친지와 아는 분이 있는 이곳 ‘영남촌’으로 옮겨오려 했지만, 결국 연무대로 가게 되었다. “아버지가 도망 온 거야. ‘전학서’ 떼어오면 어디로 간 것이 발견이 된께. 사람들이 들락거리면서 ‘아무개 여기 사네’ 하는 소문도 나고.” 

아버지는 목수일을 하였는데, 대목수였다. 당시 연무에는 이재민촌이 있었다. 아버지와 여럿 목수들이 거기에 50호를 지었다. 아버지는 목수일을 하면 그냥 소시랑 파고 일하는 사람보다 품삯을 배는 더 받았다. 그리고 집 한 채 짓는 데 하루 이틀 걸리는 게 아니라서, 집 다 짓고 나면 돈을 많이 받아오셨다.

우리가 살던 연무의 이재민촌이 훈련소 자리가 되면서 동네가 없어졌다. 그리고 정부는 이재민촌에 살던 사람들에게 은진에 있는 ‘적산땅’을 불하해주었다. 그러나 곡식을 재배할 수도 없는 황토 땅이어서, 식량(눌린 보리쌀)도 주고 집 짓는 목재도 지원해주었고, 주인이 따로 없었던 농토는 서로 알아서 자기 소유구역을 표시해야 했다. “그전에 끈이 없은께, 지푸라기 하나도 없어 은진 농사 짓는데 가서 짚을 얻어다 짊어지고 짚을 꼬아서 하나를 끌고, 여기 잡고, 여기는 삼봉이네 땅, 여기는 개똥이 땅, 그랬는데.”

그러나 우리 집은 아버지가 정부 보상금을 받아서 ‘영남촌’에 들어가 땅을 사서 거기에 살게 되었다. 망성의 들판이름은 ‘다묵뜰’, ‘척둑뜰’이었다. 그때 소유하고 있던 일본 사람 이름을 따서 불렀던 것이다. 들판 논에 물을 대는 일은 고된 일 중에 하나였다. 군산쪽 서해에서 강물이 들어오는데, 들판쪽으로 물이 얇았던 것이 물이 들어오면 물길을 열어. 물이 들판 물과 강물이 같이 맞서 맞았을 때 후딱 강물을 닫아 강물은 저 밑으로 가고, 들판 물은 들어온 물이니까. 못나가고 가두었다. 그 강물을 퍼서 논에다 퍼 올리기 위해 물 구루마(물 자세)로 가지고 밟아서 들판의 자기 논에다 물을 댔다.

“구루마를 세 개를 차려, 대간해서 많이 못해. 30분 정도는 밟으면 힘도 들고 다리는 아프고 하니까. 그냥 내려와서 교대하면서, 막걸리를 받아다가 통에다 갖다 놓고 술 먹고... 먹고 싶어서 먹는 게 아니라, 피로도 풀리고 기운도 좀 나는 거 같고.”

 

소룡리 숲속 피난살이와 ‘과부촌’

 

내가 논산에 이주하고 2년이 지난 11살 연무에서 6·25전쟁을 맞았다. “땅을 파고 방공호를 무시(무우) 구덩이처럼 땅을 파고 그 위에다 막대기로 걸쳐가지고 흙을 덮어서 위에서 폭격을 해도 괜찮다고 사람이 기어들어가게 해놓은 거지.”

6·25전쟁이 나고 논산, 강경사람들은 연무 소룡리 숲속으로 몰려들었다. 소룡리 안에는 지네길 저수지가 있었고, 소나무 울창한 곳이어서 피난하기가 좋았다. “막 비행기가 다니고 폭격을 햇싸고 그때는 강경, 논산 거기 사람들이 연무대 훈련소 소룡리로 몰려왔어. 강경으로 폭격하는 게 보이는데, 시커먼 연기가 폭격을 맞으면 나오고 그 폭격기가 인민군이 때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 미군들이 폭격한 거야. 인민군이 있으니까. 못 들어오게 차단하려고. 민간인도 있었지. 많이 죽지는 않았어도 사람들이 피난 나왔고 미처 못 나온 사람들 중 피해도 있었고.”

전쟁통에 먹지 못해서 얼굴이 부어 부황기 든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배는 고프고 먹을 것이 없으니 ‘박 바가지’가 가지고 ‘독쇠풀씨’ 를 털어가지고 풀씨를 볶아가지고 그걸 그냥 먹는 거야. 쑥 있지, 쑥도 뜯어다가 그놈을 삶아서 도구통(절구통)에 쿡쿡 찧어가지고 밀가루를 거기다 묻혀 가지고 쪄서 먹는 거야. 붓기가 쏙 빠져, 쑥이 사람한테 좋아.” 

논산에도 북한 군대가 들어왔다. 동네 사람 중에는 북한군의 편이 되어 동네 사람들을 고발했고 죽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런 비극은 다시 우리 군이 들어오면서 복수로 이어졌다. 논산 성동면 월성리는 ‘논산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북한군이 장악하기도 했지만, 북한군과 우리 군이 뺏고 뺏기면서 한쪽 편에 붙었던 사람들을 서로 죽였기 때문에 ‘과부촌’으로 유명했다. “감투를 하나 씌어주면 그 사람이 ‘저놈 나쁜 놈’이라고 인민군에게 얘기하면 그 사람말만 듣고 갖다 죽이고, 이북에서 온 인민군이 나쁜 게 아니고 이 바닥사람들 그 짓 한 거야.”

전쟁이 끝나고 농사철에는 바쁘지만, 겨울 농한기 되면 동네 또래들이랑 집에서 부모님 몰래 쌀을 가져다가 동네가게(과자 조금 갖다 놓고 파는 곳)에 가서 과자를 바꾸어 먹기도 하고, ‘나일롱뽕’ 화투를 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지금처럼 4일, 9일 강경장이 열리면 그때마다 계란 꾸러미를 만들어서 팔러 나갔다. 예전에는 닭을 많이 키워서 계란이 많았다. 10개씩을 지푸라기 꾸러미에 싸고, 꾸러미 몇 줄을 둥글게 묶어서 파는 것이다. 

장에 가면 어김없이 야바위꾼이 있었다. “동그리한 거, 깡통 뚜껑 덮는 거 3개를 넣고, 빨간 것이 붙었어. 야바위꾼이 말하기를 ‘잘보고 잘 하라’는 거야. 계란 판 돈을 가지고 조금씩 시작해서 홀딱 전부를 잃지.”

 

▲ 환갑잔치(아내) 가족사진     © 놀뫼신문

 

서른에 장가들어 사과농사 시작

 

내 나이 22살이 되어 논산훈련소에 훈련을 받고 강원도 화천에서 36개월 군 생활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왔다. 그 때쯤 아버지가 내 몫으로 땅을 나눠주셨다. 내 땅이 생기니 일하는 재미가 났다. 일하는 재미로 살다보니 결혼이 늦었지만 1969년 30살의 나이로 지금의 아내 조태순 씨를 만났다. “강경 전원예식장에서 했지. 점심때쯤 나는 양복을 입고 내 아내도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하고 점심을 먹고 폐백도 드렸는데, 양복을 입고 했지. 지금 하고 비슷하지. 그때는 신혼여행은 없었어. 식 마치고 그냥 집으로 왔지. 익산 망성에 있는 부모님과 한집에 살았고.” 

결혼하고 2년이 지나자 어머니는 ‘며느리 편하게 해줘야 한다’고 살고 있던 ‘영남촌’을 떠나 분가하라고 했다. 그 때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전 재산을 투자해서 성동면 월성리 사과과수원을 샀다. “그 동네 사촌이 살았어. 과수원을 하면 논 농사짓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해서 내 몫으로 받은 논 15마지기를 팔고 돈이 모자라서 빚을 좀 얻고 해서 2층집과 성동 과수원을 샀어. 이층집이라 해서 지금처럼 그런 것이 아니고. 방이 4칸이나 되고 창고도 있고 한데 그 위에다가 방 하나만한 다락처럼 지은 거야.”

일꾼도 두고 했다. 소도 키우고, 사과 따서 차로 소 구루마에 싣고 논산 화지시장 안에 있는 ‘대구상회’에 내다 팔았다. ‘대구상회’는 경북 대구 사람이 주인인데 지금도 하고 있다. 지금은 둘째아들이 아버지가 하던 가게를 이어받아서 하고 있다. “소 구루마를 싣고 논산으로 오는데 그땐 포장도 안 되고 자갈을 깔아서, 자동차 막 가면 소가 놀래서 팔짝 뛰어.. 소가 영리한 게 그 다음날 자리에 오면 안 갈라고 몸부림쳐.” 

신품종 사과가 많이 나오면서 우리 과수원의 사과나무는 고목이 되어가고 있었다. 접붙이기를 하면서 수지를 맞춰 봤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10년이 넘게 사과 과수원을 하다가 과수원을 팔고 은진에 와서 복숭아밭을 사가지고 왔는데 그것마저 돈벌이는 신통치 못해서 또 팔았다. 

 

공사판과 찜통 수박하우스 

 

나이가 먹어가고 아이들은 자꾸 커 가는데 하는 일마다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사우디에 나가면 돈을 벌수 있다고 해서 추진을 해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마음도 못 잡고 세월을 보내기만 했다. “애들은 자꾸 크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했어. 그때까지 남의 일도 안 해봤는데 공사판에 나갔지, 마흔 대여섯이 넘어서. 못 배운 게 하도 한이 되어서 아들은 둘 다 대학 가르치고, 딸 둘은 고등학교밖에 못 가르쳤어.”

공사판 일을 해보니까 일이 있다 없다 해서 은진 성평리에 땅을 임대해서 하우스를 시작했다. 수박 하우스 농사가 잘 되었지만, 하우스 일은 힘들었다. “토마토나 딸기는 한꺼번에 돈이 안 나오지만, 수박은 한꺼번에 확 쥐잖아. 하우스 한 동에 3~4백 받거든, 나는 일곱 동이 있었어. 땅도 내 땅도 아니고, 그 돈 가지고 애들 뒷바라지했어.”

“6월 10일경 따게 수박농사를 짓지. 그러면 도매상들이 한 달 전쯤에 찾아와서 계약금을 걸어. 수박 농사 지은 께 28백(만원)이면 계약금을 10%인 3백(만원)뿐이 안 걸어. 나머지는 수박 따갈 때 받게 되지.” 수박은 고온 작물이라서 하우스에서 난방으로 키워야 한다. 수박농사에서는 수꽃의 꽃가루를 암꽃의 화분에 발라줘야 수정이 되는데 그게 아주 힘든 일이다. “식구(아내)가 일을 잘 혀, 빨리빨리 잘 혀. 수박 수정은 12시 넘어서 암꽃에 물이 돌아. 물기가 나오기 전에 암꽃 화분에 발라 주지 않으면 수정이 안 돼.”

수정을 위해 하우스 안에서 10일 정도 빠르게 일해야 하는데, 옷이며 신고 있는 신발이 땀으로 흥건해 신발 속으로 땀이 흘러 질척거린다. “12시 지나면 안된 께, 그냥 그걸 할라고 정신없이 땀을 빼고 나서 밖에 나오면 어지러워. 지금은 벌을 넣어 가지고 벌이 숫꽃의 꽃가루를 발에다 묻혀가지고 암꽃에다가 바르대. 벌이 수정을 다 시킨께. 지금은 수박농사를 편하게 짓지.”

수박농사는 수박 장사(도매상)에 따라 한해 농사 결과가 달라진다. 수박 가격이 올라도 계약했던 가격대로 받지만 반대로 수박 가격이 떨어지는 날에는 수박장사들이 계약했던 가격에서 물건 값을 깎아 줘야 한다. 칼자루를 수박장사들이 쥐고 있다 보니 싸우게 되는 일도 다반사로 일어나게 된다. ‘수박 따기 15일 전에 수박고랑에 물을 품지 말아야’ 하는데도 수박장사들이 와서 ‘수박 크게 하려고 물을 퍼달라’ 해서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수박 팔 때면 대구상회 사장에게 연락해. 그 사람이 와서 수박시장가격 알아서 시세에 맞추어 수박 값을 쳐줘.” 대구상회는 가격이 내려도 말없이 수박을 따 가니 고마울 따름이다. 

15년 이상을 수박 하우스를 했다. “수박 넝쿨은 둘이어도, 수박은 한 개를 달려야 수박이 커. 아내가 하우스만 쳐다봐도 머리가 빙빙 돈대. ‘죽으면 죽었지 수박농사는 못하겠다’는 거야. 아내 죽이고 나서 돈 벌면 뭐하냐? 그래서 하우스를 그만두었지.”

마침 그해 건양대학교에 취업했다. 운이 좋았다. 아내는 10월 달에 들어가고 나는 11월 달에 들어갔다. 처음 2년까지 하우스하던 미련이 남기도 했다. 수박농사 한번만 하면 목돈을 한몫에 쥐는 매력이 못내 아쉬웠다. “하우스를 하면 비가 와도 걱정, 눈이 와도 하우스가 주저앉을까봐 걱정, 바람이 많이 불어도 하우스가 날아 갈까봐 걱정이지만, 지금은 돈은 적어도 그런 걱정들을 할 게 없어.”

학교에서 하는 일은 담당구역을 청소하는 일이다. 휴지도 줍고 담배꽁초도 줍고 그렇게 하루에 오전 오후로 각각 3번씩 청소를 하고 담당구역을 돌게 된다. 지금은 청소하는 일이 몸을 쓰는 일이고 계속 움직이게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운동이 되고 좋은 직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요즘도 아침에는 학교에 출근을 한다. 아내의 출퇴근을 오토바이로 시켜주고 있다. “아내가 다리를 다쳤어. 아침으로 태워다주고, 오후에 4시반이면 다시 학교에서 태워서 오거든. 점심밥은 싸가지고 가고, 노는데 그거나 해야지.”

 

▲ 환갑잔치(아내) 부부사진     © 놀뫼신문



“인사할 때는 고개 숙여서 하거라” 

 

내 생일은 양력으로 11월 13일이고 식구(아내)가 나보다 1주일 늦다. 매년 자식들이 생일에 찾아오는데 오고 또 오고 번거롭기도 해서 한해는 내 생일만 챙겨주고, 다음해에는 식구 생일로 해서 번갈아 가족들이 모인다. 물론 설이고 추석 명절이면 자식들이 모두 오고, 요즘은 호주 있는 손주가 오면 전 가족들이 모이게 된다.

나는 원주로 공사판 일을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행색이 초라하고, 옷도 꾀죄죄하였다. 목이 말라서 그 집에 사는 새 각시에게 ‘물을 달라’고 청했더니, 물을 떠서 ‘쟁반’에 얹어 가지고 주었다. 그 때는 그 ‘물 한 그릇이 술 한 그릇’보다 더 고마웠다. 가정교육이 제대로 된 교양 있게 배운 색시라고 생각을 했고, 지금까지 그 모습이 생생하다.

딸들이 집에 올 때면, ‘아이들 가정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때 얘기를 들려준다. “할아버지처럼 너희들도 그렇게 해라. 어른들 만나면 ‘안녕하세요’ 입으로만 하지 말고 고개 숙이고 그렇게 하는 거 가르쳐라. 교과서로 다 되는 게 아니야. 가정교육이 모범이고, 평소 습관이여.” 

할아버지, 즉 김종학 씨의 아버지는 학교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동네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좋았다. 우리는 집에 손님이 오시면 꼭 집밖 싸리문까지 배웅인사를 해야 했고, 집에 손님이 가시는데 그냥 문 열고 ‘안녕히 가세요’ 하면 난리를 치며 혼이 났다. 

옛날에는 거지들도 많았는데 사랑방까지 들어오게 해서 어머니에게 식사를 준비하게 했다. “사람이 못나서 거지가 아니라 돈이 없어 배가 고픈 께 밥을 얻어먹는 거야.” 거지를 사랑채로 들어오라고 해도 그냥 문 앞에 있는 거야, 미안하니까. 아버지는 ‘요담에도 배고프거든 때 되거든 오시라’고 말씀하셨지. 그런데 그 사람 다음에는 안 오더라구. 미안해서....”

 

- 성수용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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