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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가야곡면 등리 이봉순(李鳳順)님 "집 나갔다 돌아온 숫사슴과 함께"
기사입력  2019/07/10 [14:00]   놀뫼신문
▲ 이봉순 어르신     © 놀뫼신문

 

이제와 88년 내 인생을 회상해보니 지난 일들이 가물마물 어른거린다. 지나간 것은 아름답다지만 울고 웃던 온갖 인생 역정(歷程)이 속절없는 바람 같기만 하다. 아니, 살아남은 게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세월은 미움도 슬픔도 다 녹여냈지만 배고팠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옛날 그렇게 살아왔지만 지금 자식들 모두 잘 되었고 건강하다. 예서 무얼 더 바라겠는가? 덕분에 내가 행복하다. 더욱 내가 무엇이라고 시장님은 어려서 못한 공부도 시켜 주시고 상(賞)도 주시며 인생사까지 신문에 내 주시는지 감사할 따름이다.

 

 이봉순(李鳳順)  

  • 1932년 가야곡면 등1리에서 12월 20일 출생
  • 1949년 18살 2월에 서기성씨와 결혼(1남 5녀)
  • 2002년 남편 별세(74세 )

 

책보자기 동여맨 시절 

 

나는 1932 년 섣달에 마흔두 살 아버지 전주이씨와, 마흔 살 어머니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빠와 나는 11살 차이가 난다. 부모님은 아이는 많이 낳으셨지만 어려서 다 잃고 우리 오누이만 살아남았다.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덕에 일은 별로 안 했지만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제일 부러웠다. 오죽 학교에 가고 싶었으면, 책보자기에 오빠 책을 싸서 허리에 동여매고 놀았을까ㅠㅡ 일제 치하라 오빠는 가야곡초등학교 졸업 후, 군대 갈 나이쯤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갔다. 외아들을 보내 놓고 집안 분위기는 3년 내내 긴장 상태였다. 어머니의 지극한 치성 덕분에 살아 돌아왔지 싶다. 집은 여전히 가난해서 때 꺼리가 힘들었다.

 

▲ 젊은시절 증명사진으로 결혼식사진을 만들다     © 놀뫼신문


사진도 못 찍었던 혼례식

 

이럴 때, 가야할 길은 하나뿐이다. 부모님은 시집가서 밥이라도 제대로 얻어먹으라고 열여덟 살 정이월에 시집을 보냈다. 중매로 이웃 마을 스물두 살 서기성씨와 혼례를 치렀다.  시집와서 세이레 동안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어 쪽찌고 녹의홍상(綠衣紅裳) 새색시 옷으로 갈아입었다. 새신랑도 바지저고리로 갈아입고 시부모님께 큰절을 올렸다. 그 생각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니 웬일인지.... 그 예식이 끝나는 대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나는 약혼 사진을 찍고 싶었다. 물론 혼례 때도 사진사가 오기를 은근히 바랬지만 아무 사진도 찍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집 거실엔 면사포 쓰고 신사복 입은 그와 나의 신식 결혼사진이 걸려 있다. 우리 두 사람의 젊은 날 증명사진으로, 그런 예술품을 합성한 것이다. 그야말로 우리 아들의 히트 효도 작품이다.

 

시아버지는 부인 셋

 

시집오니 시댁엔 논 두 마지기가 전부였다. 시할아버지 시대엔 산도 있고 농토도 제법 있었다는데 시아버지가 다 없애신 게 아닌지? 배고프긴 친정이나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일남팔녀 중 독자였고 종손이었다. 

시아버지는 딸 하나 낳은 조강지처를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우리 시어머니를 얻어 딸 둘에 소원하던 아들 하나를 얻으셨다. 시아버지는 아들 욕심에 또다시 우리 시어머니를 따돌리고 새 장가를 들어 딸 다섯을 두었다. 팔자에 아들은 하나뿐 이었나보다. 시아버지는 셋째 어머니와 사셨다. 따라서 전 재산인 논 두 마지기는 시아버지가 농사지으며 그것으로 사셨다. 

나는 우리 친 시어머니와 남편과 셋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열여덟 어린 푼수 없는 내게 한 겨울 얼음물에 빨래를 시키시며, 시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원망을 내게 푸셨지 싶다.

시아버지는 칠순 중반에 중풍을 맞으시면서 아들며느리 집으로 쫓겨 오셨다. 온 삼 년을 꼼짝없이 병석에 누어 내 수발을 받으셨다. 나는 아무 싫은 내색 없이 대소변을 받아내며 돌보아 드렸다. 웬일인지 시어머니는 남편의 병 수발을 거절했다. 시아버지가 몹시 괴로워하실 때마다 시아버지를 안고 둘이 함께 울은 적도 많았다. 시집와서부터 사랑해 주시더니 끝내 나만 찾으셨다. 그렇게 아들, 아들 했지만 남편은 병석의 아버지를 소 닭 보듯 했다.

한 주먹 미음 쌀거리를 마련하기도 정말 벅찼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구해 죽을 쑤어 입에 넣어 드렸다. 지금처럼 장판도 아닌 왕골 대자리에다 큰것(ㅠ)을 보시면 정말 처리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전혀 거들지 않으셨다. 묘한 일이었다. 마누라에게 마지막 대접을 잘 받으려면 젊어서부터 잘해야 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서른일곱 여덟 살이었고 애들은 넷이어서 정말 먹고 살기 힘들 때였다. 순전히 남의 일을 해가며 열세 번 제사까지 모셨다. 

 

▲ 환갑때 모인 가족들     © 놀뫼신문

 

 

자식복 1남5녀 12손주

 

첫애는 딸로 19살에 낳았다. 6·25 직후라 등1리 친정에서 피란 겸 산후 조리를 했다. 다음 두 살 터울로 둘째 딸을 낳자 어른들이 무척 섭섭해하셨다. 하늘이 도우셨는지 셋째가 아들이었으므로 미역국을 편히 얻어먹을 수 있었다. 시아버지는 큼직한 고추를 금줄에 매달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실만큼 좋아하셨다. 집안 경사요 동네 경사였다. 스물네 살 때였다. 그 뒤 딸 셋을 더 낳아 1남 5녀가 되었다. 위의 두 딸은 초등학교만 나와 일만 하다 시집을 보냈다. 아들은 논산공고를 나와 토목기사가 되어 대구의 건설회사에 다녔다. 지금은 공주에 살면서 틈틈이 와서 농약도 쳐주고 농사도 거들어 준다. 딸 하나는 집을 나가 서울에서 일하며 산업체 고등학교를 나왔다. 막내딸이 공부복을 타고났는지 집에서 시내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서울에서 컴퓨터 관련 대학을 나와 직장 생활을 했다. 

큰딸이 예순아홉이고 막내가 마흔 일곱이다. 애들 셋이 천안에서 살고 평택에서도 살고 공주와 경기도 광주에서도 산다. 내 보배들, 손주가 열둘이나 된다.

 

첩 친구들에게도 점심 대접

 

나 스물여섯이던 해에 남편은 외간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윗방을 차지했다. 색이 바랄대로 퇴색한 주모였다. 나보다 세 살 어린 스물 셋, 그녀는 몹쓸 병까지 데리고 들어 왔으므로 남편도 나도 셋이서 병을 앓았다. 무슨 형편에 치료를 받았겠는가? 민간요법을 하면서 있는 대로 속을 썩였다. 

남편은 윗방이 불편하다고 나를 매일 “나가라”고 때리며 주정을 부렸다. 사랑채에 방 하나를 새로 꾸려 옮겨주었다. 그것도 싫다고 동네 저편에 방을 얻어 나갔다. 누가 환영해 주겠는가? 수시로 방을 얻어 옮겨 살았다. 

모든 사람들이 다 힘든 때었지만 우리는 두 집 살림이라 더 어려워 보리죽도 먹기 힘들었다. 나야 새끼들 먹이느라 남의 일을 했지만, 남편은 내 살림 뒤져 가는 게 일이었다. 그것이 그의 일이었다. 곤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불 한 채까지 내어주고 나니 우리는 이불 하나로 전 식구가  발만 덥고 살았나 보다. 

어느 때는 쑥을 뜯어다 쌀 한 조리를 넣고 죽을 쑤어 끼니를 해결했지만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다. 내게 있어 남편의 외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남들은 남편이 딴 살림을 차리면 쳐들어가 여자의 새 살림을 때려 부수는 게 보통이었다. 허나 그것도 ‘누울 자리보고 다리 뻗는다’고, 어지간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남편의 하는 태도로 보면 소용없을 일이었다. 

식구들의 배고픔이 가장 큰 문제였다. 삶이 원망스러웠다. 죽고 싶은 맘이 내 속을 가득 채웠다. 어느 땐가 그런 마음으로 집을 나서 뚝방 쪽으로 걸어가는데, 아들아이가 뒤 따라왔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란 생각에, 다시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사실 그 여자 됨됨이가 조금만 보였어도 나는 내 살림과 아이들을 맡기고 집을 나왔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싹은 약에다 쓰려 해도 없었다. 내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아마 이 서러움과 고생은 땅이 알고 하늘만 아실테지..... 그야말로 소설을 써도 열두 권은 넘었을 것이다.

어느 때, 그녀의 동료들이 놀러 왔는데, 남편이 나보고 “점심을 해 주라”는 거다. 군소리 없이 점심을 차렸다. 그녀들 중 나이 든 여인이 내게 슬며시 말했다. “사랑채는 곧 무너질 것이나 안채는 더 튼튼해지겠네요.” 의미 있는 예언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남편은 내가 나갈까봐 눈치를 살피고 내 비위를 맞추는 시늉을 했다. 어느 날 남편은 다 죽게 병들어 지팡이 짚고 들어왔다. 그녀와 나가 살 때였다. 있는 힘을 다해 살려 놓았더니 다시 나가 버렸다. 그럴 수가, 그리고 얼마 지나 완전히 그 여자와 정리하고 들어왔다. 여기까지 오는 데 오 년이 넘었나 보다.

 

▲ 남편과 함께     © 놀뫼신문

 

▲ 딸과 함께     © 놀뫼신문

 

▲ 젊은시절     © 놀뫼신문



뇌진탕으로 갔지만, 칠순은 챙겨준~

 

남편은 종손인 덕에 종정 논 열 마지기와 밭 천여 평을 농사지었다. 그러나 추수하고 나면 모든 게 남편 손에 들어가고 식구들에게는 쌀 한 말 주지 않을 때가 허다했다. 우리 집 뒤편의 산에서 벌목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 큰돈도 만질 수 있었다. 당시 쌀 네다섯 가마니면 논 한 마지기를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돈만 수중에 들어오면 외지에 나가 한 달도 좋고 두 달도 좋았다. 술로 그 돈을 다 썼다. 그러니 평생 논 한마지기에 밭떼기 한 평 마련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집에서 살 때도 늘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살았다. 때때로 인사불성의 남편을 집으로 데려와야 될 때가 많았다. 남편의 주머니 속에 술 먹을 돈이 있어도, 나는 나대로 남의 일을 해서 가계를 꾸렸다. 

그 날도 이웃의 배 과수원으로 배 수확을 해 주러 나갔다가 들어온 직후였다. 남편은 이웃 동네 주점에서 곤드레가 되어 집 마당까지 휘청대며 들어왔다. 그가 마당에 들어와 힘없이 곤드라졌다. 일어나지 못했다. 119가 와서 실어갔지만 뇌진탕으로 그 날 불귀의 객이 되었다.  막내딸이 아직 공부하던 때였다.

‘사람이 죽으려면 마음부터 변한다’고 하더니, 남편은 그해 내 칠순잔치를 주선했다. 자손과 친지들과 이웃과 함께 음식점에서 잔치상을 받았다. 내게 이런 호사가 있다니 꿈만 같았다. 생각해 보면 평생 마음고생과 몸고생으로 살아 왔는데 늘그막에 이런 호사를 시켜주다니 처음으로 남편이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호남고속도로 덕에 새집

 

70년대 우리나라 산업화와 경제 발전으로 집 뒤쪽으로 호남 고속도로가 뚫렸다. 아울러 우리가 살던 헌 초가집을 헐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정부 방침이었다. 덕분에 근사한 집을 짓게 되었다. 내가 사십 대 후반이었다. 정부 보조와 융자로 지은 집이었다. 

짓고 사십 년이 넘었어도 외관은 멀쩡했는데 막내 사위가 내부 수리를 살기 좋게 해 주었다. 사위가 인테리어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선물이었다. 현관문에 비밀번호가 달린 최신 장치도 설치하고 데크로 계단이며 베란다도 편하고도 예쁘게 만들어 주었다. 

 

꽃사슴 기르며 불룩해진 지갑

 

남편은 죽기 몇 년 전 꽃사슴 한 쌍을 분양받았다. 울안이 넓어 얼마든지 기를 수 있었다. 제법 잘 자라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커서 또 새끼를 낳고 열다섯 마리까지 늘었다. 녹용은 팔고 녹혈은 친지 이웃과 나누며 남편은 녹혈을 열심히 마셨다. 어느 날 김치를 담고 있는데 숫사슴이 우리를 나와 도망쳤다.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나를 때려잡을 태세였다. “빨리 안 나와서 놓쳤다”고 김치를 내던지고 온 집안을 고춧가루 판으로 만들었다. 사슴은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 후 그도 저 세상으로 갔다.

그가 떠난 후 기르기 힘들어 세 마리를 우선 팔았다.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숫사슴이 집으로 들어왔다. 살다보니 그런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사슴은 다른 사슴의 공격을 받기 일쑤였다. 끝내 살지 못했다. 나는 다섯 마리를 또 팔았다. 나중에는 전부 처분했다. 막내딸이 대학을 다니던 중이었으므로 돈은 많이 들었지만 내 수중에 돈이 모이기 시작한 거다.  

남편이 떠난 후 삼 년 간 남편이 관리하던 종중 논을 나 혼자 지었다. 난생 처음 추수한 쌀을 내 손으로 처분할 수 있었다. 비로소 내 주머니가 불룩해지기 시작했다. 막내딸 학비 대고도 남았다. 나는 여든두서너 살까지 남의 일을 해 주었다. 내 주머니는 더 불룩해지기 시작했다.  

▲ 가야곡 등리 한글대학 학생들     © 놀뫼신문


인테리어도 해준 ‘우리사위’

 

재작년부터 논산시 100세행복과에서 한글 교육을 시키고 있다. 우리 등2리 노인정에서도 화요일, 목요일에 문해 선생님이 오신다. 나는 이제 자식들에게 편지 정도는 쓰고 간단한 책도 읽으며 은행에서 돈도 찾을 수 있다. 지난해 논산시 어르신 한글 백일장에서 ‘우리 사위’라는 제목으로 시를 써서 시화(詩畵) 부분에 입상하여 시장님으로부터 상도 받았다. 너무 재미있다. 노래 교실도 있고 체조 교실도 있지만 별로 취미가 없어 한글 공부만 꾸준히 하고 있다. 

내 인생은 시아버님 돌아가시고 조금 편해졌고 남편 세상 뜨자, 물고기 물 만난 듯 내 세상이 되었다.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아들딸들이 외로울 사이 없이 드나들었다. 나는 손주들에게 용돈을 줄 수 있을 만큼 남부럽지 않게 되었다. 

이제 눈물로 산 세월이, 그야말로 소설 열두 권을 쓰고도 남을 고생이 눈 녹듯 다 녹아내렸다. 언제부터 나는 양지로 나왔다. 어느덧 88세,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 안정혜 시민기자

 

“병원비도 돌려주시는 울엄마”

우리 어머니는 워낙 어려운 시절을 살아내신 분이라 근검절약이 몸에 배인 분입니다. 거기다 남들에게 신세지지 않으려는 성격이라서, “받으면 더 많이 보답을 해야” 직성이 풀리지요.

자식들 도움까지도 될 수 있는 대로 안 받으시려 합니다. 그러므로 병원비를 내드려도 다 돌려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히려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가이없는 사랑이라 믿습니다.

어머니는 나이가 드셔도 무엇이건 열심히 배우려는 분입니다. 배우기 시작한 한글 실력도 이젠 만만치 않아 시를 써서 상도 받았습니다. 꽃을 좋아하셔서 항상 심으시지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오래 오래 저희 곁을 지켜주시길 빕니다.” ---막내딸 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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