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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탑정2리 지수내(池壽乃) 님 "주어진 길 그저 뚜벅뚜벅, 그것이 내 삶이었네!"
기사입력  2019/03/27 [13:05]   놀뫼신문

탑정2리 지수내(池壽乃) 님의 인생노트

주어진 길 그저 뚜벅뚜벅, 그것이 내 삶이었네!

 

살아가면서 모으거나 쌓는 것이 기쁨일 때가 있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버리는 것이 삶의 일부가 된다. 지나온 시간만큼 기억 역시 쌓이는 것이 아니라 자꾸 흩어진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되어버린다. 힘들었던 시간도 지나고 보니 다 행복한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름 잘 살아왔다는 방증이 아닐까. 탑정2리 지수내 님(77세)의 삶이 그렇다.


지수내 

- 1943년 12월 충남 공주군 유구면에서 출생

- 초등학교 1학년 때 한국전쟁 발발, 학업 중단

- 결혼 전까지 인조공장에서 근무

- 1966년 23세 때 논산 부적면 김영찬 님과 결혼

- 1967~1973년 2남 1녀 출산

- 15년간 탑정2리 부녀회장 역임

- 2000년 논산시장 표창장 수상

- 2005년 논산시장 표창장 수상 외 다수


즐거운 한글 수업, 색칠놀이도 재밌어요~

 

나, 지수내는 1943년 12월 공주군 유구면에서 1남 5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6·25가 일어났다. 전쟁 중에 가까운 곳인 공주군 신풍리로 피난하였다. 피난 기간이 얼마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피난에서 돌아와 보니 벽에 구멍이 뚫려 있고 놋그릇이란 놋그릇은 남아 있지 않았다. 

 전란이 끝나고 할아버님이 도롯가에 있는 집에서 살기 싫다고 해서 약 500m 떨어진 동네 안쪽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한 후에 어머니는 계속 딸만 낳으셨다. 그러다가 막내로 아들을 낳으셨다. 6·25 때 태어난 여동생은 몇 해 전에 세상을 떴다. 

 학교를 그만두고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은 별로 없지만, 그때 당시에 주위에 인조공장이 많았다. 이모가 한 분 계셨는데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다니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왔다. 공부하기 싫었는데 이모가 공장에서 일해 보라는 말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이불단, 홑청 같은 것을 짜는 직조공장에 다녔다. 20살이 되었을 때쯤 서울에서 있는 친구 따라 미아리 공장으로 옮겨서 일했다. 일에서 오는 힘겨움은 당연한 거였지만 잠이 너무 고팠다. 그래도 내게는 찬란한 순간이었다.

나의 꿈, 나의 희망인 가족

 

맞선 본 날, 남편 김영찬 님과 함께

 

 

부적으로 시집와서 

 

23살에 친정집 옆에 논산시 부적면이 고향인 시고모님께서 중매하셨다. 시고모님 댁에서 쥔양반(주인양반, 남편)이 될 사람(김영찬)과 선을 봤다. 선을 보고 서울에 올라갔더니 서울 사람은 다 미남이었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요즘과 달리 그때는 어른들이 정해준 자리는 거부하면 큰일 난다고 생각했다. 선을 본 가을에 결혼했다. 결혼 전에 고생이라는 것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것 이외는 없었다. 가족 또는 집안 살림에서 힘든 거는 전혀 몰랐다.

 시집을 와서 보니 시부모님에 당시 27살인 남편에 비해 나이 어린 시동생 둘이 있었다. 시어머니께서 열둘을 낳으셔서 세 명만 붙잡았다고 했다. 시동생 한 명은 초등학교 3학년이고 막내 시동생은 5살이었다. 한번은 어린 시동생에게 감자를 안 쪄준다고 부지깽이로 맞은 적도 있다. 시동생이라서가 아니라 어려서 뭐라 탓도 못 하고 누구에게도 하소연을 못 했다. 시어머니는 자손을 많이 잃으셔서 몸도 마음도 약해져서 병치레를 몹시 하셨다. 내가 아파야 아픈 것을 알던 사람이 낯선 상황에 부닥치니 하나하나가 쉽지 않았다. 한 분을 고쳐놓으면 다른 분이 아프시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배, 나는 등대

 

쥔양반은 예민하지만 심성은 무척 착한 사람이다. 동네에서 다들 알아주는 양반이다. 그것은 타고나는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런 믿음이 없다면 삶은 더욱더 퍽퍽했을 거다. 그렇지만 그런 믿음이 생기기 전에 딱 한 번 결혼을 후회한 적이 있다. 10월 그믐에 시집왔는데 다음 해인 정월 초에 쥔양반이 느닷없이 아팠다. 그런데 다행히도 두 달 만에 나았다. 얼마간은 또 아프면 어쩌나 긴장했지만 지금껏 그런 일은 없었다. 직장 다닐 때는 2교대로 근무하니까 잠이 무척 고팠다. 그래서 잠만 많이 재워주는 데라면 코언청이라도 시집간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소박한 꿈이 아니라 엄청난 사치였음을 알았다.

 조금 있는 땅에 농사짓는 것만으로 가족을 부양하기는 쉽지 않았다. 큰아이 낳고 한 달 만에 쥔양반은 객지로 나가 일을 했다. 번듯한 직장에서 일하면 좋았겠지만 노가다(막노동)를 했다. 전국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면서 한 30년을 일했다. 한 달에 한 번 온 적도 있다. 그사이 둘째, 셋째와 막내가 태어났다. 그 당시 어느 가정에나 보통 일이지만 나 역시 아이 하나를 잃었다. 아홉을 잃은 시어머니가 계셨지만, 하나든 둘이든 자식을 먼저 앞세운다는 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심으로 넋을 놓을 수도 없었다. 어른들을 봉양하며 시동생 둘에 내 아이들 셋을 키워야 했다. 

 농사일했는데 시아버님은 해수(咳嗽)가 있으셔서 많이 못 하셨다. 그래도 어떻게든 뒷받침하면서 농사를 지었다. 논산에서 딸기 농사가 도입되던 해에 딸기 농사를 시작했다. ‘금성농장’이라고 시에서 해줬다. 쥔양반은 30년간 농사가 바쁠 때는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객지로 나가 일을 했다. 딸기 하우스 2~3동을 하다가 그마저 힘들어서 7~8년 전에 임대했다. 

 

수술하고도 일하다보니 다리는 벌어지고

  

친정어머니는 내가 시집오고 7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친정아버지는 유구에서 살다가 남동생이 서울로 직장을 얻으면서 함께 올라갔다. 나 살기가 바빠서 친정 일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니 그게 치매였던 것 같다. 친정아버지는 약간의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셨다.

 시아버님은 84세에 돌아가시기 3년 정도를 제외하고 해수로 고생하다 가셨다. 어머님(시어머니)은 96세로 3~4년 전 윤색 든 3월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자식을 많이 잃고 잘 드시지 못해 결핵을 앓으셨다. 다행히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는 나으셨지만, 보건소에서는 애들하고 밥도 같이 주지 말라고 했는데 차마 그렇게 못 했다. 함께 밥도 먹고 생활하고 병에 걸리는 것도 팔자 속이라고 여겼다. 다행히 애들은 다 건강히 자랐다. 

 우리 어머님은 참으로 마음씨가 좋으셨다. 그래서 내가 더 잘 모신 것 같다. 결혼할 때 받은 3돈 자리 반지를 팔아 약값으로 쓰고 뼈다귀(소뼈)를 끓여드렸다. 친정어머니하고는 잠깐 살아서 정이 별로 없었는데 시어머니와는 오래 살아서 정이 깊었다. 시부모님은 전혀 시집살이를 시키지 않았다. 가끔 예민한 남편이 맥없이 트집을 잡을 때나 설령 내가 잘못을 했을 때도 어머니께서 아들에게 당신 잘못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내가 더 존경하고 살았던 것 같다. 

 딸기 농사를 30년 지으면서 생계를 꾸렸지만, 몸을 혹사하는 일이었다. 앉아서 매야지 앉아서 따야지 오랜 시간 그러다 보니 골반이 벌어지고 허리디스크가 왔다. 43살쯤에 갑자기 다리가 빠졌다. 서울에서 뼈를 맞추는 체육관 관장한테서 활법으로 고쳤는데 논 한 필지, 지금 돈 1000만 원이 들었다. 애들이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내가 그런 상태가 되자 다들 고등학교만 마치고 사회로 나갔다. 지금은 나름 잘 살고 있지만, 공부를 제대로 시키지 못한 것이 무척 마음에 걸린다. 

 다리를 고친 후 다시 딸기 농사를 시작했다. 다리를 계속 그런 식으로 쓰니까 다리가 벌어져서 끼우뚱 끼우뚱 걷게 됐다. 2016년에 공주의료원에 가서 다리 양쪽에 연골을 넣는 다리 수술을 받았다. 이제는 몸조리하면서 먹고 놀고 있다. 젊어서는 국내여행은 가기는 했지만 남들 다 간다는 외국에 한번을 못 갔다. 내가 아프면 가라 해도 못 가고, 가면 둘이 가야하는데  지금 나는 괜찮아도 쥔양반이 대장염으로 고생한 지 9년 정도 됐다. 정기적으로 두 달마다 병원에 가야 하지만 그래도 그만한 것에 만족한다.

 

자전거 타는 부녀회장

 

배운 것도 없는데 부녀회장을 해라고 해서 15년 정도 회장직을 맡은 것 같다. 이름자밖에 모르는 나에게 왜 부녀회장을 하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잘했거나 못했거나 탑정2리 부녀회장을 15년간 했다. 부녀회장을 1980년부터인지 언제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할 사람이 없어서 내가 계속한 것 같다. 지금은 부녀회장이 하는 일도 많지만 그때는 다들 생활이 어려워서 특별히 할 일도 없었다. 모심는 것 같은 공동 작업을 할 때 밥해서 내가곤 했다. 

 시부모님을 모시는 일이든 부녀회 일이든 내게 주어진 일이기 때문에 소리 없이 했던 것 같다. 살다 보면 얕은 데 높은 데가 있는 것처럼 나쁜 거도 좋은 거도 함께한다. 나는 차분하지 못한 성격이라 그 직석(즉석)에서 풀어야 한다. 속에다 스트레스나 불평을 안 넣고 산다. 사람들이 나보고 사납배기 지랄배기라고 하지만 끝나면 뒤끝이 없다. 그래서 남들에게 인정은 받는 것 같다. 이런 성격 덕분인지 잘했나 어쨌나 부적면 부녀회 부의장도 했다. 부끄럽지만 공을 인정받아 상을 많이 탔다.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전일순 시장께 받은 은수저를 지금도 쥔양반이 쓰고 있다. 

 부녀회장을 하면서 자전거를 타게 됐다. 거리가 머니까 이곳저곳 자전거를 타고 다녀야 했다. 지금은 일이 없어 심심할 때, 또는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타고 주변을 돌곤 한다. 부녀회장을 맡으면서 배운 자전거가 지금은 나를 더 자유롭게 하는 발이 되어주고 있다. 

한글학교 졸업식, 자녀들이 더 뿌듯해 하는 학사모를 쓴 모습

 

남편에게 못한 말, 그리고....

 

어릴 때는 먹고 살기 어려워서 꿈같은 것은 생각도 못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가장 큰 보람은 50년 시부모님 봉양하며 자식들 키워서 다 잘살고 있으니까 그게 보람이지 다른 것은 없다. 결국 그런 것이 나의 성취라면 성취이다. 

 혈압약은 먹고 살아도, 살만은 하다. 나이가 드니까 여행 이런 것도 힘들고 요즘은 아침 먹고 한글 공부하러 오는 날만 기다린다. 한글 공부는 작년과 올해 2년간 배웠다. 글은 조금 알아서 조합(농협)에 가서 돈을 뺄 때 내 이름 석 자는 쓸 수 있었다. 그렇지만 글자는 읽어도 글씨를 이상하게 썼다. 1년간 배우면서 참 많이 늘었다. 주위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고 하고 내가 봐도 글씨가 그리 밉지 않다. 지난번 백일장에서 내가 살아온 길을 썼는데, 글을 더 배우면 앞으로는 죽을 때까지 앞으로 내가 살아갈 길에 관해 쓰고 싶다. 무엇보다 수다 피는 것이 재밌다. 나는 좋고 나쁜 사람들 없이 동네 언니들, 동생들, 친구들과 그냥 화평한 마음으로 그렇게 지낸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쥔양반은 아프지만 유지하고 사니까 좋다. 바라는 것은 손녀딸이 외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지금은 귀국해서 취업 면접을 보러 다닌다. 원하는 직장에서 일하게 됐으면 좋겠다. 큰손자가 군대 간 지 아직 한 달이 안 됐다. 건강히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하면 좋겠다. 

 결혼반지를 팔아 부모님 봉양하는 데 썼다는 말을 쥔양반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을 했으면 저 양반은 없는 형편에 꼭 사줘야 한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래도 형편이 좋아졌을 때 내 나름대로 반지 목걸이, 팔지를 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거 하면 촌스러우니까 안 하고 다닐 뿐이다. 그런데 결혼한 이후 쥔양반에서 받은 최초의 선물은 2년 전 내 생일에 사 온 꽃바구니다. 참 감동적이었고 고맙다고 했다. 게이트볼 치는 데서 코치로 있다. 지금 82살인데 노인 일자리 창출로 해서 돈을 받은 것 같다. 작년에는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했더니 하고 싶은 거 하라며 돈 50만 원을 주었다. 결국 쥔양반 병원비로 나가고 생활비로 썼지만 그래도 감사했다. 꽃은 시들어 사라지고 돈 역시 주머니에서 빠져나갔지만, 예전에 판 결혼반지를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다.

 

 

     
 

 

모래시계 같은 자식 내리사랑 

 

당신 무엇이 되기보다 당신으로 인해 자녀가 뭔가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 당신은 늘 뒷전이고 결국은 마지막이어도 그 마지막 차례마저 기꺼이 다시 내주고도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 어머니 마음인 것 같다. 지수내 님이 인터뷰 도중에 눈물을 훔치셨던 부분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우리 애들은 휴일 때도 9시, 10시까지 잔 적이 없어. 먹고 자라 먹고 자라 그랬지. 늦게까지 자 본 애들이 없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아쉽다. 큰아들은 전기 일을 하고 작은아들은 강서구 시장에서 가게를 해요. 지금 걸리는 게 밤 10시에 나가는데 아침 10시에 퇴근을 해요. 저렇게 잠을 못 자고 일을 하는데 어렸을 때 잠이나 실컷 재우는 건데...... 내가 원래 잘 안 울어요.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울컥하네요.” 

 어렵던 시절 자식을 바르게 키우고자 엄하게 대했던 어머니는 지금껏 그것이 마음에 남았을 거다. 먹을 것이 부족한 시절 잠이라도 실컷 재웠더라면 지금 덜 고단할까 하는 미안함이 담긴 눈물이었다. 또한 어릴 적에 어머니를 진수성찬으로 모시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있는 아들에 대한 고마움의 눈물이었을 거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모래시계인 것 같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지만, 위가 다 비워지면 그다음엔 뒤집어서 반대로 흘러야 한다. 이런 모습이 있어야만 인생은 정체되지 않고 계속 흐르는 것이 아닐까 한다.

 
     

 

-박용신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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