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100주년 기획시리즈(2)]
강경3·1운동 효시 엄창섭 열사의 고향 상제마을과 제석교회
엄창섭 열사의 후손 엄성용 장로
엄창섭 열사 생전모습
1919년 3월 10일 강경 옥녀봉에서 ‘삼일 독립 만세혁명’의 거사를 최초로 주도했던 엄창섭 열사! *1㈜ 엄 열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그가 태어난 곳을 찾았다. 익산시 웅포면 상제길 31, 논산 강경에서도 30리 떨어진 곳, 그곳은 열사의 부친인 엄주환 선생 때부터 사셨던 종가집이다. 그 집은 엄창섭 열사의 생전 모습을 증언해주실 엄성용(74) 장로님이 지키고 있었다.
기독교가정과 미션스쿨에서 훈련된 애국혼
웅포면 상제길 31의 31..... 삼일,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우연치고는 기막힌 우연 같다. ‘상제마을’ 알리는 커다란 이정표가 우뚝 서 있다. 동네어귀에 어르신 한 분이 나와 계셨다. 딱 봐도 엄성용 장로님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가 있었다. 장로님께서는 집 앞 공터를 가리키면서 이곳이 사랑채 자리라고 알려주셨다. 이 사랑채가 열사님과 삼일 혁명에 아주 중요한 장소라는 것을 실감한 것은 나중이었다.
열사님이 부친 엄주환 선생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이야기부터 들었다. 엄주환 선생의 사랑채가 바로 제석교회 첫 예배지였기 때문이다. 열사님은 군산 영명학교를 졸업하였다. 군산 영명학교는 1903년 열사님 나이 11세에 설립되었다. 그 학교의 설립자가 바로 구암 교회의 전킨 선교사이다. 그 선교사님이 1896년에 구암교회도 창립한다. 이 구암교회가 바로 부친 엄주환 선생과 관련이 있다.
제석교회 고패집 예배당 단체사진
구암교회에 부위렴 선교사가 성경학교를 개설하였는데, 엄주환 선생 등 상제마을 6명이 여기 출석하게 되고, 그러면서 이 교회 정식 교인이 된다. 그때가 1899년, 열사 나이 7세때일이다. 그 후 선교사님에게 허락을 받아서 엄주환 선생 사랑채에서 제석교회 설립예배를 드리게 된다. 이 때가 1903년 열사 나이 11세때이다(제석교회는 1908년 우리나라 최초 고패집 예배당*2㈜). 이렇게 부친 엄주환 선생과 제석교회, 그리고 전킨 선교사가 설립하고 엄창섭 열사가 다닌 영명학교가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다.
엄성용 장로 집안으로 들어가니 열사님과 그 부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먼저 눈에 띈 것은 열사 부친이 고종황제로부터 1904년에 참봉 관직을 받으신 교지였다. 그리고 진열함에 정성스레 놓여진 열사님의 대통령 표창과 국가훈장과 자그마한 탁자 앞에 열사님의 사진이었다.(필자는 기록을 위해 장로님과 열사님의 생존모습 사진을 그대로 찍었다.) 열사님의 친손자 집을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열사님 친손자가 아니라는 뜻밖의 말씀을 하신다. “제가 종손집이고, 열사님이 ‘종중의 어른’이라서 기록과 자료를 관리하고 있어요.”
엄주환 열사 부친의 관직 교지
열사님 얘기를 시작하자, 열사님의 일제 재판기록을 보여주신다. 이미 ‘강경독립만세운동 학술대회’에서 그 재판기록을 토대로 발표(발표자 이덕주 교수)된 내용이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강경 삼일 독립만세혁명’인 3월 10일의 이야기는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그 외에도 열사님이 강경 삼일 혁명의 거사 지도자로 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일제 징계기록물’도 보여주신다.
열사님은 6형제중 셋째였다. 당연히 부친의 영향으로 제석교회를 출석하였고, 부친과 인연이 있었던 ‘군산 영명학교’를 다니게 되었으며, 학업을 마치고 부여 세도 ‘창영학교’의 교편 생활을 하였다.
엄창섭 열사 6형제(좌측 앞이 열사)
“열사님은 제 할아버지(열사님의 큰형)과 무척 친하게 지내셨어요.” 장로님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둘째 형이 집안의 양자로 가셔서, 열사님이 형제 중 둘째가 된 셈이었어요.” 이러한 집안 사정은 큰형이 집안을 맡아야 해서 농사일에 전념해야 했고, 둘째였던 열사님이 결과적으로 대외적인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열사님은 삼일 혁명 8년 전 1911년, 19세 나이에 송갑수 여사와 혼인하고, 그 다음해 큰아들 기연씨를, 삼일 혁명 후 옥중에서 큰딸 효순씨 출생을 알았다.
엄창섭 열사의 어머니
엄 열사와 두 아들
“밥상은 태극이나 무궁화모양으로 놓거라”
장로님에게 열사님의 공주감옥에서 2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오신 후 행적을 묻자, “웅포 고향을 떠나 광주로 가셔서 ‘광주 숭일학교’ 교편 생활을 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 당시 교장이 엄화섭 장로님이셨는데 아는 집안어른이라서 도움이 되었을 거라”는 답이다.(유일하게 생존해 있지만, 요양원에 있는 둘째 아들 엄남익 씨가 확인까지 해준 내용이라고 전해주었다.)
열사님은 고향인 익산 웅포 상제마을, 학창시절을 보냈던 군산, 교편생활을 했던 부여 세도, 삼일 혁명을 주도했던 강경에도 살 수 없었던 것 같다. 일제는 강경 삼일 혁명을 주도했던 열사님을 가족, 친지 그리고 많은 지인들, 그리고 지역민들과 분리시키려 했다. 우리의 자주 독립을 꺾으려는 일제의 분열정책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웅포를 떠나서 광주로 간 열사님은 이후 해방 전까지 2남 1녀의 자녀를 더 두어서 3남 2녀의 가정을 이루게 된다.
해방이 된 후 열사님이 행적이 궁금했다. 열사님은 해방이 되어서도, 고향 웅포로는 돌아오지 못하셨다고 한다. “열사님은 고향을 잊지 못하고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서너 달까지 제 할아버지(열사님 큰형)와 함께 기거하시면서 지내셨어요.” 열사님은 그때부터 반주를 하셨다는 이야기를 덧붙여 주신다. “소주 2홉짜리 큰 병을 사오라고 하셔서 곁에 두고, 식사하실 때마다 딱 한잔씩 드세요. 제 할아버님이 장로님이어서 불편해하시는 눈치였는데도요....”
열사님은 일제에 의해 당했던 고통, 그리고 일제에 의해 고향을 등지고 떠나 살았던 타향생활, 누구도 독립유공지사라고 하지 않았던 시절, 그 깊은 상실감을 달래기 위한 본인만의 해소방법을 그렇게 찾으신 모양이다. 장로님 옆에 계시던 사모님이 열사님을 기억하면서 말을 거든다. “상을 차려가면요, ‘상위에 그릇이나 음식을 무궁화모양이나 태극모양으로 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목포 할아버님은 그렇게 늘 나라 사랑밖에 모르셨어요.”
이제부터는 사모님의 말문이 터졌다. “웅포에 오셔서 바깥에 다니실 때에 잘못된 일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시고, 가지고 다니시던 지팡이로 혼을 내주셨어요. 경찰이건 공무원이건 가리지 않고 큰소리로 ‘나라를 위해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그렇게 강하신 목포 할아버님께서 애국가가 나오면 눈물을 흘리셨어요. 눈물이 참 많으신 분이었지요.”
열사님은 강한 분이었다. 일제하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쳤던 강인한 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눈물도 많았다는, 인간적인 섬세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세심한 감성은 자녀들에게로 이어진 듯하다. 열사님의 아들 3형제 모두가 음악계에 연주자와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그 당시 큰아들은 목포 KBS 악단 멤버로 활동했다. 목포 큰아들과 함께 생활하신 열사님은 고향 웅포 친지들에게 ‘목포 할아버지’로 기억되고 있었다.
생전에는 유공자로도 인정 못받아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시고 그리워서 고향집과 큰형을 찾아오기만 하셨던 열사님! 그런 열사님에게 아픔과 안타까움을 주는 일화가 있다. 열사님은 10여 년을 고향 오가면서 삼일 혁명의 증언자로만 다녔다고 한다. “선거 때가 되면 후보들이 목포할아버지를 모시고 가세요.” 선거 전략상 삼일 혁명을 지도하셨던 독립유공지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모양이다. 열사님을 그렇게 이용하기만 하려 했던 우리시대의 비극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지내던 열사님이 큰 손자를 보신 다음에는 거처를 서울로 옮기신다. “고향에 오시면 다들 ‘서울 할아버지’라고 불렀거든요” 사모님 말문이 다시 터졌다. 그 큰손자(엄민용)는 서울에서 소아과의사로 병원장이다. 1972년 향년 80세, 열사님은 사랑했던 조국의 자주독립과 번영만 꿈꾸다가 자녀들이 사는 서울에서 운명하셨다. 고인이 되어서야 고향땅 익산, 부친과 조상들이 계신 웅포로 영구 귀향하신 것이다.
선거 때만 되면 그 많던 사람들이 찾던 삼일 혁명의 지도자이건만, 엄창섭 열사님은 국립현충원에 가지는 못하셨다. “국가에서 독립유공자로 지정을 못 받았어요.” 그 많던 사람들이 증인으로 있었던 그 시절, 국가로부터 아무런 공로도 인정받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셨다는 것이다. 살아 계실 때도, 돌아가신 이후에도 조국만을 일념했던 열사님은 그가 사랑했던 조국 대한민국으로부터 그렇게 외면당했던 것이다.
대전 현충원 엄열사 묘
대통령 건국훈장 애족장
1980년, 후손들이 힘을 모아 열사님의 독립유공 내용을 국가에 신청하게 되었으나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의 헌신을 인정한다는 대통령 표창만 받았다. 다시 후손들이 자료를 찾아 나서고 보충한 1990년, 드디어 건국포상 애족장 훈장이 주어졌다. 이어서 1994년 3월 정부에서는 국가 유공자에 주어지는 국립현충원 이장을 통보하였고, 종중(宗中) 의견을 거쳐서 독립유공지사 묘역으로 열사님을 모시게 된다.
열사 친필인 시조묘비
열사 친필 묘비(3.1 의사 근섭, 본인을 지칭)
인터뷰를 마무리 지으면서 열사님이 어떻게 불렸는지 궁금했다. 장로님은 “우리 창섭 할아버지를 ‘삼일 의사’라고 불렀어요.”라고 답하면서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시조 묘지의 헌사를 쓰시면서 마지막에 ‘3.1운동 의사 근섭’이라고 써 있는 사진은 실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주석
*1㈜ 엄창섭 독립유공 지사를 열사로 호칭하였다. 인터뷰 글에서 나온 것 같이, 주변사람들은 열사님을 삼일 의사로 불렀다고 한다. 그렇게 된 연유는 있는데, 최근 호칭에 맞추어 열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1977년 원호처의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독립 운동사 편찬을 앞두고 항일 선열들의 공적을 조사할 때 대충 정해졌었다. ‘열사’는 직접 행동은 안 했어도 죽음으로 정신적인 저항의 위대성을 보인 분을, ‘의사’는 주로 무력으로 행동을 통해서 큰 공적을 세운 분으로 하기로 했다(1987, 동아 횡설수설칼럼). 최근 국가보훈처 의견에서는 ‘열사’는 맨몸으로써 저항하여 자신의 지조를 나타내는 분으로, ‘의사’는 무력(武力)으로써 항거하여 의롭게 돌아가신 분으로 정해두고 있다.
*2㈜ 고패집은 일자집의 한쪽 끝에 부엌 등을 앞으로 꺾어 배치한 집, ㄱ자집, 곱은자집, 곱패집 평면이 ㄱ자 모양이다. 일자집 건물에서 한쪽 끝에 외양간이나 부엌을 달아내어 ㄱ자 모양의 곱은 평면이다. 고패집 예배당으로 제석교회가 사용하게 된 것은 갑신정변때 일이다. 고종황제때 서장관을 지낸 홍재찬 선생과 그의 아들 홍종필, 조카 홍종익이 정변을 피해 울진을 거쳐 상제마을에 이주해 온 것이 출발이 되었다.
이후 홍종익은 군산 구암교회(최초 개복교회)의 교인되어 열사의 부친 엄주환 선생을 초대하여 성경학교에 출석하게 하였다. 이때 엄주환 선생은 부위렴 선교사를 설득하여 교회 설립허가를 받고, 선생의 사랑채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그 다음해 홍재찬의 아들 홍종필씨 고패집인 자신의 집을 희사하여 그 집을 제석교회의 예배당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제석교회 고패집 예배당은 교회의 건축구조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 성수용(시민기자, 아모레퍼시픽 논산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