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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제도
성씨
기사입력  2008/09/09 [10:53]   김학용

   
 

 

   
 

-성씨의미-

사람이 태어나면 가장 먼저 얻는 것이 성씨이다. 성씨는 그 자체가 혈연관계를 나타내는 성(姓)과 지연을 나타내는 씨(氏)의 이중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는 부계 위주의 사회이므로 태어남과 동시에 부(父)의 성과 씨를 이어받으면서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는 일본이나 서구와는 달리 평생 사용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통용되고 있는 성(姓)은 모두 한자로 되어 있다. 한자 성을 사용하는 나라는 중국과 한국, 일본 및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로 알려져 있으나 본래 한국에도 고유의 성(姓)은 있었다. 다만 중국 한자성(中國 漢字姓)의 전래로 우리 고유의 성(姓)이 전해지지 않아 본래의 모습을 알기 어렵게 됐다.

고유의 성(姓)은 원래 고래(古來)의 단순한 씨족 명칭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후 청동기의 수입과 농경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에 대한 정복 전쟁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정복자와 피 정복민 간에 복속 관계가 형성됐다.
복속 관계가 형성됐을 때 정복 민과 피정복 민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씨족 명칭이 사용됐다.

그 후 계급 내에서 정치적, 경제적 차별이 생겨나면서 또 다시 계급 분화가 진행되어 소수의 상층 계급은 다른 부류들과 구분 할 명칭, 다시 말해 고유의 성을 사용하게 된다. 이후 고유의 성은 중국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한자화 된 성(姓), 혹은 한자를 차자(借字)하여 사용하게 됐을 것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따르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했기 때문에 고(高)씨라 하고, 주몽은 충신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사성(賜姓)했다”한다. 그러나 중국 한서에 나타나 있는 인명의 기록에는 ‘주몽’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왕시대에 장수왕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했으며,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했다 한다.

백제는 온조(溫祚)가 부여계통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했으나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등의 진서에는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 되어 있다.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 부터 위덕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했다고 전한다.

신라는 박(朴), 석(昔), 김(金) 삼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했다고 하는데,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7세기 이전에 건립된 “신라 진흥왕의 네 곳의 순수비”와 “신라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진평왕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비문에는 인명에 소속부명(촌명)과 이름만 쓰여져 있어 선조들은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삼국 시대의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백제는 근초고왕시대(346~375)부터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국,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이 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 여(餘), 김(金)씨 등의 성을 쓴 것으로 기록되어있다.(삼국유사, 삼국사기 인용)

- 성의 분화 -

성씨의 특권은 계급의 표시로서 초기에는 왕족은 물론 부족장에 기원을 둔 유력한 혈연 집단이 우선하여 성을 사용했다. 이후 왕권 다툼에서 밀려나 낙향한 진골이나 지방관으로 파견된 관리들, 원래 지방에 터를 잡고 있던 세력가들이 호족으로 득세하면서 기존의 성을 고수하거나 새로운 성으로 바꾸고, 중국과의 교류 과정에서 들은 저명성을 차용, 혹은 스스로 성을 만들면서 성의 분화를 촉진시켰다.

특히, 신라 말에는 유학생·유학승·무장·무역상 등의 왕래가 빈번해져 중국식 성의 사용에 익숙해졌다. 그리하여 9세기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게 됐을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 가운데에서도 이들의 성을 모방하여 사용하는 자가 늘어나게 되어 성의 사용이 보편화되어 갔다. 이와 반대로 중죄인 또는 반역한 무리에게 박탈을 의미하는 거성 혹은 변성을 명한 예도 있다.

- 본관의 역사와 생성과정 -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성씨(姓氏)가 확대 되면서 같은 성씨라도 계통(系統)이 달라 그 근본과 동족(同族) 여부를 가리기 위해 등장하게 된 것이 본관(本貫)이다.
본관(本貫)의 체계가 확정된 시기는 고려 초기로서, 그 이전에는 출신지가 신분의 표시로서 성의 구실을 해왔다. 본관은 시조의 출신지 또는 씨족이 대대로 살아온 고장을 가리키며, 이것은 다른 종족의 같은 성과 구별하기 위해 쓰이기도 했다.
本貫은 관향(貫鄕), 관적(貫籍) 또는 관(貫)이라고도 하며, 원래 관은 돈을 말하는 것으로서 돈을 한 줄 꿰어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이 친족이란 서로 관련성이 있다는 뜻으로서 더 나아가 본적(本籍)이란 뜻으로도 사용됐다.
2000년 인구조사 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씨는 286개로서, 본 관수는 김씨(金氏) 349본(本), 이씨(李氏) 276본, 박씨(朴氏) 159본, 정씨(鄭氏) 136본, 최씨(崔氏) 159본, 강(姜氏) 33본, 서(徐氏)씨 57본이 있으며 총 본 관수는 4,300여개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각 성씨별 비율을 보면 “김(金)씨는 21.6%인 992만, 이(李)씨는 14.8%로 679만, 박(朴)씨는 8.5%로 389만, 최(崔)씨는 4.72%, 정(鄭)씨4.37%, 강(姜) 2.씨27%, 조(趙) 2씨.14%, 윤(尹)씨2.06%, 장(張)2.00%, 임(林)씨1.66%, 오(吳)씨 1.54%, 한(韓)씨1.53%, 신(申)씨1.52%, 서(徐)씨 1.51%, 권(權)씨 1.42%, 황(黃)씨 1.40%, 안(安)씨 1.39%, 송(宋)씨1.38%, 유(柳)씨 1.31%, 홍(洪)씨 1.13%, 전(全)씨1.07%, 고(高씨) 0.95%, 문(文)씨 0.93%, 손(孫) 0.90%, 양(梁) 씨0.85%, 배(裵)씨 0.81%, 조(曺)씨 0.79%, 백(白)씨 0.76%, 허(許)씨 0.65%, 남(南)씨 0.56%를 차지하고 있다.
위에 기술한 이들이 한국 1위부터 30위 성씨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같은 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동성동본(同性同本)의 집성촌락을 이루어 가문(家門)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자치적으로 상호 협동하여 집안 일을 해결해 나가는 특이한 사회조직의 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개인의 업적이나 명예가 결국은 가문(家門)에 귀착, 개인의 사회적 성공이나 출세는 그 가문 구성원 모두의 사회적 신분을 높여 줬다.
? 중국이나 일본의 성씨는 1위부터 2, 3위의 분포가 비교적 고르게 나타나 특정 성씨로 지나치게 몰리는 경우가 없는 반면, 한국의 경우만 1, 2, 3위가 이상할 정도로 특별히 많다.
이는 1900년대 초에 처음 호적법이 시행될 때 “양반이 되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빚어진 기형적인 현상으로 분석된다. 일본 메이지 유신 때에 “전 국민 성씨 가지기” 정책을 시행, 전 국민으로 하여금 성씨를 만들어 가지도록 했다. 이 때 대부분의 국민들은 각자 자기 집의 위치나 동네의 특징을 살린 성씨들을 다양하게 창씨, 8만여 성씨가 존재케 됐다.
그러나 민족의 역사를 논할 때 성씨에 대한 자존감은 별로 따지지 않을 뿐 아니라, 성씨에 대한 애착 또한 강하지 않다. 중국이나 한국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일본은 한일합방이후 계급을 타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 국민으로 하여금 성씨를 만들어 가지도록 했으나 결과는 일본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국민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던 “돌쇠, 밤쇠, 바우, 개똥이, 향단이, 삼월이, 오월이” 등은 일본처럼 새로이 성씨를 만들지 않고, 이들 대부분이 그 동네 지주나 양반들에게 부탁, 성씨를 얻어 와서는 관청에 신고했다.
이때에 김(金) 씨나 이(李), 박(朴)씨가 갑자기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특정 성씨가 총 인구의 20%를 넘어 가는 경우는 없는데, 양반 대우를 받고 싶은 사람이 많았던 우리나라에서 나타난 대단히 특이한 현상이다. 이후 우리나라는 결과적으로 전 국민의 양반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예전에 많던 “방자, 향단이, 마당쇠, 개똥이, 바우, 밤쇠”의 자손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게 됐다. 게다가 누구나 “정승, 판서의 몇 대 손”이 되어 양반의 후손만이 존재하는 나라로 변했다.

/김학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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