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에 한참을 서 있었다. 사람이 서 있는데도 많은 차가 속도를 내며 그 앞을 질주한다. 면허시험을 볼 때 횡단보도에 행인이 있으면 정지하라고 했는데, 도대체 이 규정을 지키는 운전자가 없다. 나는 속으로 그 숫자를 센다. 하나, 둘 ~ 일곱, 여덟. 그러나 한 사람도 서지 않는다. 팔을 들어 손가락으로 하얀 선을 가리킨다. 그래도 서지 않는다.
어쩌지. 사진을 찍어서 경찰서로 가야 하나. 나의 어설픈 정의감이 고개를 든다. 그런데 이제 무디어져서 상당히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만둔다. 그러면 어쩌지. 그냥 차가 오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좌우를 살핀다. 드디어 행렬이 멈췄다. 재빠르게 길을 건넌다.
애초에 횡단보도에서 차가 멈춰 주기를 바란 게 잘못이다. 깊이 반성하며 다시는 그런 허황된 기대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차가 서지 않는다고 화를 내면 나만 더 손해다. 그런 손해 볼 짓을 하지 말라고 자신을 타이른다. 그게 상책이다.
너도 그렇지?
늦은 저녁을 먹는다. 속도를 높여 달려가면서 식당 문이 닫혀 있지 않기를 빈다. 멀리 식당이 보인다. 희미하게 불빛이 보인다. 드디어 식당 주차장에 도착. 차가 많지 않아 쉽게 주차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여기저기 정다운 사람끼리 앉아서 밥을 먹는다. 아니, 지금은 술을 먹는 시간이다. 얼큰하게 취했는지 시끌벅적하다. 밥 먹을 시간이 두어 시간이나 지났으니 지금까지 밥을 먹을 리는 없다.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은 술을 먹기 때문일 것이다.
옆자리를 슬쩍 훔쳐보니 빈 술병이 여러 개다.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무슨 이야기를 열심히 한다. 상대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지 목소리가 크다. 그 소리들이 식당 안에 가득하다. 모두가 각자 열중하고 있어서 시끄러운 줄도 모르고 귀에 거슬리지도 않아 한다. 참 아름다운 정경이다.
나는 음식 주문 태블릿에서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찾는다. 자주 식당에 오는 편이지만 이 방법에 아직도 서툴다. <식사>에서 하나를 골라 손가락으로 터치한다. 두 그릇을 시켜야 하는데 추가하는 화면이 나타나지 않는다. <주문>을 누르면 그 화면이 뜰까 하여 가볍게 터치한다. 그런데 화면에는 내가 바라는 대로 나오지 않고 주문 완료라는 화면이 뜬다. 난감하다. 그때 종업원이 내게로 다가온다. 아마도 내가 헤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나 보다. 한 그릇을 추가해 달라고 말했다.
사람이 직접 주문을 받는 데가 줄었다. 대개의 식당은 기계를 통해 먹을 음식을 주문해야 한다. 그리고 카드로 값을 치른다. 그러면 한참 후에 로봇이 음식을 날라와 옆에 선다. 그 음식을 내 손으로 식탁에 올려야 한다. 사람 구하기가 어렵고, 인건비 부담이 크다고 해서 고안해 낸 방법이다.
앞으로는 식당만이 아니라 도처에 이런 방식이 보급될 것이다. 나이든 사람들은 기계 조작이 어려워 차표를 끊거나 밥 한 그릇을 사 먹기도 어렵게 되었다. 시대의 흐름이 그러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어떻게든지 이 방법에 적응하여야 한다. 아, 좋은 세월 다 지나갔다.
너도 그렇지.
들판에 벼가 노란색을 띠기 시작했다. 뜨거운 햇볕을 받으면 단단하게 속이 차서 알이 굵어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노란색은 황금빛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면 벼 이삭이 무거워져서 고개를 숙일 것이다. 주인이 부지런한 논은 피 하나가 없다. 그러나 주인이 게으른 논은 피가 빼곡하게 자라 황금색이 아니라 시커먼 색깔이다. 벼보다도 피가 알차게 영글어 내년에는 더 많은 피가 건장하게 자랄 것이다. 그래서 벼는 더 허약해지고 논이 온통 피 천지가 되어버릴 것이다.
세상도 마찬가지다. 피를 없애지 않으면 정작 선량한 벼들은 움츠리고 살아야 한다. 세상에는 벼가 자라지 못하게 하는 피의 종류도 다양하다. 피가 횡행하는 사회는 불빛은 보이지 않고 어디나 다 어둡다. 어둠 속에서 피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온통 피로 뒤덮일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누가 나서서 저 피를 잘라내야 하는데, 그럴 가망은 매우 적다. 아, 아, 이를 어쩐단 말인가.
너도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