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진의 儒覽日誌] 효자고기 을문이 이야기
효자산천에서 태어나 ‘효자별’이 된 ‘강응정’과 효자고기 ‘을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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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유교문화진흥원 효문화 홍보공간 '효자고기 을문이 이야기' 포토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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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시 가야곡면 함적리에는 효자로 이름난 중화재 강응정 선생의 묘소와 선생의 효행을 기리는 효암서원(충남도문화유산자료)이 있다. 선생의 자는 공직(公直), 호는 중화재(中和齋), 본관은 진주다. 선대는 신라와 고려 때에 대대로 벼슬하면서 현달했는데, 통정 강회백이 조선에서 처음으로 벼슬하였고, 사맹을 지낸 강수인이 부여에 와 터를 잡았다. 증조부는 참판을 지낸 강인이고, 조부는 판서를 지낸 강문백이다. 아버지는 참판으로 지중추부사에 오른 강의인데, 이때부터 은진에 살게 되었다.
선생은 경서를 잘 외웠고, 의술과 점술, 지리도 두루 섭렵하였다. 1470년(성종 1)에 효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1483년(성종 14)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김용석‧신종호·박연·손효조·정경조·권주·정석형·강백진·김윤제 등과 함께 주자의 고사에 따라 향약을 만들었으며, 매월 초하루에 소학을 강론하였고, 성리학에 깊이 몰두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대과 시험을 보지 않고 은거하며, 오직 옛 성인의 학통을 이어 후학을 열어주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고 문하에 많은 학자들이 모였다. 그의 세 아들, 강인린, 강호린, 강한린은 모두 참봉을 지냈다. 현손인 청계 강복중도 참봉을 지냈는데, 성품과 행실이 뛰어났다. 5세손인 동은 강종효는 유생의 몸으로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왕을 호위하였다.
선생의 문장은 전하지 않지만, 선생의 효행 관련 사실과 그에 대한 평가는 『중화재실기』에 후세의 기록으로 전한다.
하나, 꿈에 신령이 나타나 부모님 병을 낫게 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들었는데, 하루는 꿈에 신령님이 뜰에 내려와 “내일 손님이 와서 너의 어머니 병을 반드시 낫게 해줄 것이다”라고 했다. 다음 날, 정말로 한 소년이 찾아와 “저의 이름은 원의이고, 윤왕동이라는 곳에 삽니다”라며, 하룻밤 머물기를 부탁했다. 응정이 방을 내어주며 어머니의 병에 관해 물었다. 소년이 알려준 대로 약을 지어 드리고 보름이 지나자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 또, 아버지가 설사병에 걸렸을 때 응정은 자신이 아버지 대신 아프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도하며,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처럼 정성을 다해 보살펴드렸다. 새벽이 될 때까지 잠을 못 이루며, 때로는 아버지의 변을 맛보기도 하였다.
둘, 호랑이도 감동시킨 효성
부모님이 연이어 돌아가시고 난 뒤 응정은 5년 동안 원대동 묘소 곁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술과 과일, 소금에 절인 채소를 먹지 않았다. 그래서 땔나무같이 뼈가 앙상해졌고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겨울엔 맨발로 지내 온전한 피부가 없을 정도였다.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호랑이 한 마리가 찾아와 움막 옆에서 응정을 보호해주었다. 5년 동안 호랑이가 매일 찾아오니, 응정도 호랑이를 가축처럼 여겼다. 시묘살이가 끝나고 응정이 집으로 돌아가니 그제야 호랑이도 떠났다. 이후 응정이 꿈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가 말하길, “어느 곳에 있는 함정에 빠졌으니 구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응정이 놀라 잠에서 깨어 곧바로 그곳에 가보니, 한 사람이 칼을 들고 호랑이를 해치려 하고 있었다. 응정이 “그 호랑이는 내 호랑이요”라고 소리치고는, 시묘살이할 때의 일을 모두 말해주었다. 응정이 호랑이를 구하고 손으로 털을 어루만지자 호랑이도 꼬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응정과 호랑이는 함께 시간을 보냈고 호랑이는 다시 떠났다.
셋. 효자암과 효자지팡이
강응정의 효성이 알려져 명나라 효종황제 앞에 나아갔을 때 일이다. 철로 만든 지팡이를 꽂으면 효자인 경우에만 들어가는 효자암이라는 바위가 있었다. 황제가 응정의 지팡이를 그 바위에 꽂게 하니 지팡이가 들어갔다. 다시 뽑게 하니 반쯤 나와서는 더 이상 뽑히지 않았다. 황제가 그 이유를 물었다. 응정이 말하길 “저는 본래 효자가 아닙니다. 어릴 적에 어린 동생을 등에 업은 일이 있는데, 동생이 심하게 울었습니다. 그래서 손바닥으로 동생의 팔을 세게 때렸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노여워하시며 저를 보았습니다. 저는 이 일이 지금까지도 죄송스러워 잊히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가상하게 여겨 지팡이를 다시 들게 했더니, 지팡이가 가볍게 뽑혔다. 감동한 황제가 강응정에게 포상을 내렸다.
넷. 효자별이 되어 황제에게 알려진 강응정의 효성
중국 명나라 효종황제 때, 천문을 살피는 관청인 흠천감(欽天監)에서 하늘의 효자성이 조선을 비춘다고 보고하였다. 황제가 신기하게 여겨 그 사람이 누구인지 찾게 했는데, 강응정이었다. 응정이 명을 받고 황제 앞에 갔다. 이때 황제는 밥을 먹고 있었는데, 숟가락을 밥뚜껑의 오목한 부분 위에 두고 말하길, “그대가 효자라면 숟가락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응정이 숟가락을 세웠다. 그러자 황제가 효자 이름을 열거한 종이에 강응정의 이름을 쓰고, 그 위에 옥새를 찍고, 응정에게 정려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다섯. 효자별이 지다
강응정이 죽자, 효자별이 떨어지는 기이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성종 임금이 응정의 효행을 표창하여 정려를 내렸다. 또 갈산 10리와 인천 한 굽이를 하사하고, 자손 대대로 병역과 세금을 면제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응정을 이조판서로 증직하고, ‘문순(文順)’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또 ‘효암(孝嚴)’이라는 편액을 서원에 하사하고 사액하였다.
효자산천에 세워진 ‘효암서원’
고을의 동쪽 강층리에 선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갈산사를 지었다. 그러나 임진·정유 양란으로 모두 잿더미가 됐다. 후에 우암 송시열이 “중화재 강응정 선생은 대현이므로 민멸되어서는 안된다. 중건하여 영령을 편안히 모시는 것이 마땅하다”라며 중건을 주장했다. 이에 숙종 계사년(1713)에 갈산에 서원을 중건하고 ‘효암서원’이라 하였다. 영조 갑자년(1744)에 서원의 왼쪽에 정려도 중건됐다.
논산시 가야곡면 함적리는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어린 시절 효행에 감응해 인천수에는 ‘을문이’라는 물고기가 출현했고, 율령천에서는 잉어가 깨어진 얼음에서 뛰어올랐으며, 원대동에서 시묘살이할 때는 호랑이가 곁을 지켰다. 선생의 효행을 장려하여 임금이 갈마산과 인천 일대의 땅을 하사했고, 길이 후대에 귀감으로 삼기 위해 효암서원이 세워졌다. 선생의 묘소와 효행 유적이 남아 있고, 지금도 선생의 후손이 그 터를 지키고 있는 갈마산과 율령 일대를 후세 사람들은 ‘효자산천’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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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지도> 논산 가야곡면 강응정 효행 관련 유적 ‘효자산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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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암서원(우측- ‘효자 강응정 정려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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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귀감이 된 효행
선생의 효행 사실은 『해동명신언행록』, 『삼강행실록』, 『여지승람』, 추강 남효온의 『사우록』, 『해동야언』, 『동각잡기』 등 명신을 기록한 책에 수록되어 후세에 전해졌고, 시로써 칭송되었다.
갈산의 무게는 태산과도 같고(葛山之重泰山如)
백세토록 효자가 산 곳이라 명성이 전하네(百世名傳孝子居)
시묘살이 5년에 들 호랑이가 따랐고(先壠五年馴野虎)
청계 한 구비에는 은어(을문이)가 생겼네(淸溪一曲産銀魚)
아름다운 징조는 왕상 마을과 같고(休徵畢至王祥里)
미물의 감응도 동씨 여막과 같네(微物偕和董氏廬)
길일에 서원에서 향기로운 제사를 올리니(吉日祠宮芬苾薦)
지금도 풍운이 옛터에 진동한다오(秖今風韻動遺墟)
한국유교문화진흥원은 강응정 선생의 효행을 알리기 위한 공간 ‘효자고기 을문이 이야기’ 포토존을 운영하고 있다. ‘을문이’는 선생이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잡아서 드린 물고기로, 논산 병사유원지 인근 논산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중화재실기』에는 을문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인천수에는 은문어(銀文魚)가 있는데, 세상에서 이 물고기는 선생이 부모님을 봉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크기는 올챙이처럼 작고 비단 무늬에 은빛을 띠었으며, 돌 사이를 다니면서 무리를 짓는다. 지금 사람은 통발을 이용해 남김없이 이를 잡는데, 내장을 끓여 먹으면 대단히 맛이 좋다. 이 물고기가 사는 곳은 오직 이 물의 위아래 6~7리뿐이다”
- 장을연 한국유교문화진흥원 국학진흥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