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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탐구] 속절없이 멸망한 백제의 ‘안불망위’ 교훈
기사입력  2024/02/05 [13:23]   놀뫼신문
[기획탐구] 역사를 잊은 민족 미래는 없다
속절없이 멸망한 백제의 ‘안불망위’ 교훈
 
“군자는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지녔을 때 없을 때를 잊지 않으며, 다스려질 때 어지러울 때를 잊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바로 주역 『계사전』에 나오는 ‘안불망위(安不忘危)’의 가르침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했던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2024년 세계경제는 분명 녹록치 않아 보인다. 아니 심각한 수준이다”라며,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면서 불길한 조짐들이 고개들기 시작했다. 코로나 초기부터 시장에 쏟아부은 돈들이 거대한 쓰나미로 돌아오고 있다. 민간과 공공 모두 부채의 덫에 빠져 옴짝달싹하기 힘든 지경”이라는 칙칙한 경제 전망을 내놓았다.
여기에 지구 곳곳의 전쟁과 기후변화 등은 생산망 붕괴를 위협하며 초세계화에 대한 반발을 야기하면서 각자도생에 접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뉴욕타임스는 지난 1월 25일 미국 정부 당국자 말을 인용해 “북한 김정은이 앞으로 몇 달 내 한국에 대해 모종의 치명적 군사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1월 15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한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으로 규정하고,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 평정, 수복하는 문제를 헌법에 반영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 북한의 대남 도발 가능성에 대한 공개 경고도 잇따르고 있다. 대니얼 러셀 전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는 지난달 25일 미국 싱크탱크 ‘아시아 소사이어티’ 포럼에서 북한이 2010년 연평도 포격을 넘어서는 공격을 할 의도가 있는 것 같아 보인다면서 “우리는 김정은이 충격적인 물리적 행동을 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듯 ‘안불망위’의 가르침이 절실한 지금, 속절없이 멸망한 백제의 역사적 교훈을 되짚어 본다. 
 

 

■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백제 멸망’이 가르치는 역사적 교훈
 
  • 660년 6월 21일 :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 12만2천여 명과 배 1,900척 규모의 대군이 덕적도에 도착.
  • 660년 7월 9일~10일 : 백제의 마지막 보루인 계백장군이 이끄는 5천 명 결사대가 지금의 연산인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이 이끄는 5만여 명의 신라군에게 패하면서 백제는 멸망의 길로. 
  • 660년 7월 12일 : 나당연합군 사비(부여)로 진격
  • 660년 7월 13일 : 의자왕 웅진(공주)으로 피신
  • 660년 7월 18일 : 의자왕 항복
  • 660년 8월 2일 : 나당연합군 승전 의식에서 의자왕과 부여융(아들) 치욕적인 항복의식.
  • 660년 9월 3일 : 의자왕, 왕족, 신료 및 백성 1만2천여 명 당나라로 끌려감. 
 
이와같이 당나라군이 웅진 앞 바다 덕적도에 도착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백제가 멸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학자들은 그 이유에 대해 “타성과 자만심에 젖어 충신들을 몰아내고,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며 나당연합군 결성을 수수방관한 점이 결정적인 패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백제 의자왕(599~660)의 이름은 ‘부여의자’로 망국의 군주이기 때문에 시호는 받지 못했다. 의자왕은 641년 제31대 백제 국왕에 오르며 초기에는 신라의 미후성을 비롯해 40여 개의 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그러던 중 의자왕 8년인 648년, 신라와 당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는 밀약을 맺는다. 내용인즉, ‘당나라가 군대를 보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을 신라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백제 의자왕은 당나라와 국교가 단절된 상태로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운명의 660년을 맞이한 것이다. 
이와같이 “백제가 전혀 예상치 못하다가 속절없이 멸망했다”는 해석이 등장한다. 지난해 경향신문에 게재된 ‘이기환의 Hi story’에 의하면, “나당연합군의 공세로 사비가 함락될 때 부여 능산리 절의 승려들은 불전에 향을 피울 때 쓰던 대향로를 며칠만 숨겨두면 괜찮을 거라 여기고 공방터 물통에 감추고 도망쳤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백제는 그 길로 속절없이 멸망하고, 나당연합군은 나라의 제사를 지내던 이 절을 불태웠고, 공방터 지붕도 폭삭 무너졌다. 그래서 ‘금동대향로’도 그 후 1300년 이상 공방터에 묻혀버렸다”는 것이다.
이후 ‘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 12일 부여 능산리 절터의 목곽 수로 안에서 극적으로 발굴되었으며 ‘국보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 백제_금동대향로_국립부여박물관     ©

 

■ 백제 독립운동의 최후 거점 ‘가림성’
 
강경에서 세도를 지나 10여 ㎞ 국도를 따라가면 부여 임천면이 나온다. 이곳에는 대한민국 사적 제4호인 부여 ‘가림성’이 있다. ‘가림성’은 백제 후기 사비성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석성이다. 그런데 최근 ‘가림성’이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가림성 사랑나무’라는 사진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가림성은 백제 의자왕이 항복(660년)한 지 12년이 지난 672년까지 백제의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남아 있었다. 
<삼국사기>에서는 “671년 6월, 신라 문무왕은 장군 ‘죽지’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가림성의 벼를 밟도록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백제 독립군의 군량미 확보를 사전에 막으려고 한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멸망의 조짐을 전혀 감지하지도 못했던 백성들은 너무도 허망하게 왕조의 기둥이 뿌리째 뽑혀버리자 가열찬 백제의 부흥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왕족 ‘복신’과 승려 ‘도침’이 앞장서 본격적인 부흥 투쟁에 나서며 마침내 661년 9월, 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백제의 새 임금으로 옹립한다. 나당연합군에 항복한 지 1년여 만에 새로운 임금 ‘풍왕’을 내세우며 부활을 도모한 것이다. 그래서 백제의 마지막 왕이 ‘의자왕(641~660)’이 아니라 ‘풍왕(661~663)’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풍왕의 즉위는 내부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복신’은 ‘도침’을 죽이고 ‘풍왕’이 ‘복신’을 제거하자, 신라는 부흥군의 최후 거점인 주류성을 공격하기 위해 5만의 정예병을 파견한다.
663년 8월, 위기에 처한 풍왕은 ‘왜’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마침내 금강하구에서 백제와 왜, 신라와 당나라가 서로 연합되어 대규모 동북아시아 국제적 해전이 펼쳐진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자치통감’ 등에서는 저마다 ‘백제와 왜’ 연합군의 궤멸로 끝난 이 처절한 해전을 생생한 필치로 전하고 있다.
이에 백제 부흥군을 이끌던 ‘풍왕’은 고구려로 망명하고, 의자왕의 다른 아들인 ‘부여충승’과 ‘부여충지’가 지키던 주류성과 마지막 항전을 벌이던 임존성 역시 함락된다.
그런데 의자왕이 항복한 지 12년, 풍왕이 금강하구 전투에서 패한 지도 9년이 지난 672년까지도 나당연합군이 완전히 차지하지 못했던 성이 바로 부여 ‘가림성’이라는 것이다.
 

▲ 부여 가림성 전경_진우석 촬영_제공 한국관광공사     ©

 

▲ 거대한 암벽 사이로 난 길_진우석 촬영_제공 한국관광공사     ©

 

 

 

 

■ 부여 '가림성'은
 
부여 가림성은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와 장암면에 걸쳐 세워진 산성으로 백제 동성왕 23년인 501년에 세워진 산성이다. 1963년 1월 대한민국 사적 제4호 ‘부여 성흥산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현재의 명칭인 부여 ‘가림성’으로 변경되었다. 1979년부터는 매년 4월 말 ‘가림성’ 봉화대에서 봉화제가 열리는 ‘임천 충혼제’가 개최된다.
‘가림성’이 있는 성흥산은 높이가 260m에 불과한 높지 않은 산이지만, 부여로부터 휘돌아 나가는 금강을 끼고 있는 평야지대로 인해 탁 트인 시야를 제공해 인근 강경, 논산은 물론 서천, 익산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백제 부흥군의 최후 근거지 중 한 곳이었던 ‘가림성’이 요즘 MZ세대의 핫플레이스로 각광받고 있다. 이는 ‘가림성’ 정상에 위치한 느티나무 때문이다. 일명 ‘가림성 사랑나무’라고 불리는 이 느티나무는 키가 22m, 가슴둘레는 5m 40cm에 달하며, 수령이 무려 440년 정도로써 2021년 8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느티나무가 사랑나무가 된 연유는 반쪽짜리 하트 문양의 나뭇가지를 합성해서 온전한 하트 문양을 만드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MZ세대의 사랑놀이 때문이다. 
여기에 ‘가림성’ 느티나무가 드라마 촬영지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KBS의 ‘대왕세종’과 KBS2의 ‘천추태후’, SBS의 ‘서동요’와 ‘바람의 화원’, tvN의 ‘환혼’ 등의 드라마에서 촬영장소로 활용했다.
이와 같이 501년 축조된 가림성은 663년 금강하구(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이 우회할 정도였고, 그 이후에도 9년 이상 백제 독립군의 근거지로 존재했다는 기록을 보면, 부여 가림성은 백제 멸망과 그 이후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유적이다. 
  

▲ 계백장군표준영정_백제군사박물관     ©

 

■ 계백장군과 황산벌전투 
 
계백장군은 의자왕대에 성충(成忠)·흥수(興首)와 더불어 백제 3충신(三忠臣)으로 한사람으로 꼽히는 장수로, 백제 역사에서 충절(忠節)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계백장군은 의자왕 20년(660) 7월 더운 여름 나당연합군 5만여 명이 사비도성에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결사대 5천여 명을 이끌고 황산벌(현재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 신암리 일대)에 나아가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죽음을 각오한 백제군은 먼저 황산벌에 도착하여 세 곳의 험한 요충지에 진(陣)을 치고, 세 갈래 길로 진격하는 신라군을 맞아 네 번이나 싸움에 이겼다.
그러나 신라군은 관창(官昌)같은 어린 화랑들의 죽음에 힘입어 사기가 올랐으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마침내 계백장군과 백제군사는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백제군은 패하고 말았다.
그 후 백제 유민들이 장군의 시신을 수습, 가매장한 것으로 전해져왔는데, 조선 숙종 6년(1680)에 계백장군의 위패(位牌)를 주향으로 모신 충곡서원(충청남도 기념물 제12호)을 인근 충곡리에 건립하고 향사(享祀)를 지내기 시작했다.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지정 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된 후 계백장군 묘에서 매년 제례를 지내오다 2005년 유적지내에 사당인 충장사(忠壯祠)를 건립한 이후부터 이곳에서 계백장군 제례를 지내오고 있다.
 
 
-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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