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쓴 사람이 아름답게 보인 시절이 있었다. 원시도 근시도 아닌 사람이 쓰는 선글라스는 매혹의 다른 이름이었다. 유명 배우가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났을 때 아가씨들은 환호의 탄성을 질렀다. 안경을 쓰고 싶어 눈이 나빠졌다고 거짓말을 하는 친구도 보았다. 부모님을 졸라 어렵게 구하게 된 값싼 선글라스가 시력을 더욱 나쁘게 하는 줄은 몰랐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부질없는 짓이었다. 시력이 2.0인 사람이 왜 안경을 써야 하는가 말이다. 자외선 차단이라는 명분으로 쓰는 안경이라지만 그게 눈에 그리 유익했던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돋보기를 애인처럼 가까이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안경을 쓴다는 것이 이렇게 불편한 것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도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다. 신문은 더더욱 볼 수가 없다. 아이들에게 떼어주는 자반 가시도 보이지 않아 손자에게 가끔 핀잔을 듣는 형국이다. 이제는 돋보기가 애인이요 친구요 반려자로 자리매김 되었다.
사물을 보는 데는 일정한 잣대가 있다. 미움의 안경을 쓰고 보면 모두가 밉게 보인다. 반대로 사랑의 안경을 쓰고 보면 모두가 사랑스러워 보인다.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사물은 180도로 달라 보이는 것이다.
오늘 광고방송에서 의미심장한 얘기를 들었다. 그럴싸한 내용이다. “아이의 안경엔 미래가 보이고, 엄마의 안경엔 사랑이 보이고, 할아버지의 안경엔 인생이 보인다.”는 내용이다. 그렇다. 나는 무릎을 쳤다. 옳은 말이다. 효과 100%일 것 같다. 안경 광고라는 차원을 넘어 반드시 그러해야만 하리라.
아이는 미래에 살아야 한다. 꿈과 희망을 간직하지 못한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니다. 꿈과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아이에게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찬란한 미래를 알차게 준비하기 위해서는 차별화된 혜안이 필요하다. 밝은 햇살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둡고 칙칙한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과는 그 격이 다르다. 그렇기에 아이의 안경으로는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를 보라 했는가 싶다. 미래를 보는 아이는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보리를 닮을 수 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살아가는 아이들이라면 얼마나 희망적인가. 때론 엉뚱하다고 할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갖고 살아가는 아이들에겐 비전이 있는 것이다. 엉뚱한 생각은 개성적 문화의 아버지요 자신만이 갖는 창의성의 어머니이기에 하는 말이다.
엄마는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 사랑과 용서와 관용을 지니지 못하고 살아가는 엄마는 엄마의 자격이 없다. 농익은 사랑일수록 좋은 것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낡았어도 좋은 것이 사랑이다. 부드러움과 달콤함을 갖추지 못한 엄마는 자식들을 양육할 준비가 안 되었다는 말이다. 때론 엄한 꾸지람과 질책이 뒤따라야 할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엄마는 아빠와 함께 사랑이 듬뿍 녹아있는 칭찬과 격려의 마음으로 가슴을 볼록하게 채워야 한다. 사랑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반드시 필요한 마음의 양식이다.
할아버지는 그간 살아온 인생을 반추해야 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살아온 날들을 되짚어 본다. 격동의 세월이 안경 속에 나타난다. 질풍노도 같은 세월이 있었다. 훈풍이 짙께 깔려 간질이는 속에 아카시아 향을 발산하던 시절이 있었다. 가만히 눈 감고 되짚어 보는 세월 속에 가슴 찡하게 했던 일들과 가슴 저미게 했던 일들이 파노라마 되어 되살아난다. 이때 할아버지의 얼굴엔 희열과 흥분이 교차 되어 나타난다.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서 긴장하던 순간이 그립다. 가슴 뿌듯해지는 인생의 오후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노후의 여유를 즐긴다. 이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 있으랴.
모두가 차원 높은 삶을 살 일이다.
▲ 문희봉 (文熙鳳. 시인·전 대전문인협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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