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임’이라는 밀크 케이크 크림을 먹게 되었다. 아이스크림을 즐겨 먹는 편이 아닌데 어떤 기회가 되어 ‘설레임’을 손에 넣게 되었다. 처음에는 속까지 얼어 있어서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먹을 수 있었다. 뚜껑을 돌려 열고 빨아서 먹는 크림이다.
한참을 먹으며 생각하니 내가 엄마 젖을 빨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었다. 갓난아이 시절엔 엄마 젖을 먹으면서도 행복하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배고프다고 울면 엄마는 젖꼭지를 내 입에 물렸을 것이다. 그리고 배불리 젖을 먹고 나서는 놀든지 자든지 그랬겠지.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었겠는가. 나나 엄마 모두 말이다.
나도 그랬을 터이지만 기억에 없고 네 살 터울의 아우가 엄마 젖을 이빨로 물어 아프게 했던 기억은 또렷하다. 그러면 엄마는 “아, 이놈이 나를 괴롭히네,”하시며 허허 웃으셨다. 젖꼭지에 상처가 나도록 무는 아들이지만 얼마나 대견했겠는가? 젖을 물리고 조금 여유를 가질 때의 어머니 모습을 떠올려 본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표정으로 만족의 미소를 짓고 있는 어머니 모습을 떠올려 본다.
모유 수유에 대한 이로움은 말해 무엇하랴. ‘설레임’을 빨아 먹다 보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향수처럼 스며온다. 습자지에 떨어진 물방울이 번져나가듯 그리움이 핑크빛을 띤다. 젖꼭지를 입에 물고 나는 하늘을 나는 고운 꿈을 꾸었겠지.
나는 세상 신고식으로 고고지성을 울렸겠다. 그로부터 생존에 대한 애착을 키웠다. 나뿐이겠는가? 인간이 아닌 모든 동물도 그랬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은 더욱 그랬겠지.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내 부모님, 일하러 나갈 때 어머니는 논둑이 좀 넓은 곳에 나를 내려놓고 “내 새끼야. 잘 놀고 있어.”라며 김을 맸을 터이다. 그리고 내가 칭칭거리면 배고프다는 걸 알아차리시고 한걸음에 달려와 옷고름을 푸르셨겠지.
그런 어머니가 내 곁을 떠나신 지 꽤 오래 되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오늘 따라 새록새록 진한 파문을 던지며 밀려온다. ‘설레임’을 빠는 동안 나는 의도적으로 어머니와의 행복했던 시간 속에 더 머무르려 노력했다. 옆에서 보내는 동료들의 메시지도 사절하면서.
항상 기쁜 날만 있었으랴. 당신이 짊어지고 가야 할 아픈 숙명도 함께 동여매고 사셨으리라. 엄마의 눈꺼풀에 치렁치렁 매달려 있는 눈물을 나는 가끔 본 기억이 있다. 농사일로 하여, 가진 것 없어도 이웃들에게 베풀기를 즐겨하셨던 아버지로 하여, 철모르고 천방지축 사고를 치는 자식들로 하여 하루도 편할 날이 없으셨던 어머니의 일생에 나는 왜 웃음을 많이 드리지 못했는지 자성의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린다. 살아오면서 어려울 때면 더욱 그리워지는 내 어머니다.
유난히 허벅지 길이가 짧아 운동횟날 공책 한 권 못 타오는 아들에게 “허벅지가 짧아 못 달린다고 한탄하기 전에 달리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마라.”는 채찍을 주셨던 어머니다. 인성은 그만하면 됐는데 공부가 좀 부족하다고 늘 격려의 말씀을 주셨던 어머니다. 그러면서도 원동(遠洞) 김 면장 댁 아들과의 비교는 사양하셨다.
어머니가 해주신 말씀들을 나는 지금까지 부적처럼 가슴 속 깊이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는 내 삶에서 언제나 마르지 않고 흐르는 사랑의 샘물이다.
고향 집 대문을 들어서면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겨주시던 어머니 모습이 기억 속에서 꼬리를 문다. 환히 웃으시던 모습이 눈동자에 굴절된다. 대문을 들어서면서 ‘어머니’하고 불러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고아가 된 지 십여 년이다. 고향 집에서 자는 날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던 옛일들이 우리 모자가 누워 있는 방안으로 가득 밀려와 추억을 되새기게 했다.
“팔십 평생 열심히 일했더니 늙을 새가 없었다.”시던 어머니 말씀이 귓전을 맴돈다. 어머니 안 계신 세상은 적막감 그 자체였지만 그걸 이겨내고 살아온 자신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다 파 먹여 빈껍데기만 남은 몸으로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모시를 삼고, 마늘을 까고, 자식들의 옷을 마름질했다.
‘설레임’을 먹으면서 어머니 말씀대로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보리를 닮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해본다. 어머니의 마음속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옛일들이 나무뿌리처럼 고통스럽게 얽혀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자식들 뒤에 빈껍데기가 되어 서 있는 어머니가 일구어놓은 이랑의 곡식들이 더욱 튼실해 보이는 오늘이다.
오늘 밤은 유년의 그때처럼 어머니 품에 안겨 잠들고 싶다.
▲ 문희봉 (文熙鳳. 시인·전 대전문인협회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