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한바퀴| 취암동 화지4통
논산역전앞동네 화지동 “아, 옛날이여!”
논산역에서 내리면 역전 광장이다. 광장에서 좌회전하면 시내요, 우회전하면 덕지동~아호리다. 광장 앞 큰길 건너편으로 좌우 6~7백m 구간이 화지4통이다.
우리가 입에 익어서 줄곧 쓰는 중복어가 처가집, 혹은 역전앞이다. 그런데 화지4통은 역전(驛前) 광장에서 또 그 앞이니 ‘역전앞’이라는 표현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역전앞 우림빌딩에는 마을금고, 편의점 2개, PC방, 게임방, 체대입시 체육관, 수정교회가 들어서 있다.
부동산 시장에서 길라잡이로 앞장 세우는 키워드가 역세권(驛勢圈)이다. 논산역 주변은 역세권의 표본이었다. ‘논산’을 <돈산>으로 만들어줄 만큼 번창했던 곳이다.
그때 그시절 여인숙 세 곳
역 주변은 산업1번지이기도 했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남성성냥공장이 있었고, 한국산업사는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열차에서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을 상대로 요식업, 숙박, 유흥업소가 성행했다.
시대가 바뀌어도 논산역전 숙박업은 여전하다. 여인숙, 여관 들이 철로를 따라 무인텔, 모텔 등 현대식 숙박업소로 바뀌어서 철도를 내려다 보고 있다. 그러나 도로 오른편인 화지4통은 예전의 모습을 꽤 많이 간직하고 있다. 여관은 둘이고, 아직도 여인숙 간판을 단 곳이 3곳이다. 지금은 제일인력공사로 바뀐 3층빌딩에 간판은 내렸지만, 빛바랜 영남여인숙 글씨가 벽면에 그대로다.
여인숙(旅人宿), 가난했던 시절, 숙박비를 한푼이라도 더 절약하려는 사람들에게 고맙고도 반가운 잠자리였다. 곤한 몸 하룻밤 묵어가는 추억과 낭만의 숙소지만, 애환과 비애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군사도시 논산, 입영열차가 들어오는 논산역, 훈련소 젊은 장정들을 겨냥해서인지 논산땅에는 유흥업소가 많았다. 그 중 하나가 “아저씨, 방 따뜻해요. 쉬었다 가세요!” 기차에서 내린 남자들은 인정 어린 호객을 당하기 일쑤였다.
전국에서 읍이 3개나 되던 논산군에서 그런 구역을 연무대는 208이라 했고, 강경은 소쿠리전, 논산은 논산역전골목이라 불렀다. 이제 그런 호객행위가 제도권에서는 사라졌지만 <욕실완비>를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여인숙은 몇몇 그대로다.
통장, 30년 만에 바뀌면서 부는 바람
현재 화지4통은 예전 화지동32번지로 통칭되던 곳 일대다. 대교동쪽으로 우향우 하면 개울이 나온다. 그 뒷강을 건너면 대교4통이니 작은 또랑이 화지4통과 자연스런 경계선을 그어준다. 뒷강은 조흥로즈빌 아파트를 끼고 흐르는데, 북으로는 거기까지가 경계이다.
이 구역 내 가구수는 170여 가구이며, 거기에 500여 명이 옹기종기 살고 있다. 이 동네에 최근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통장선거가 치루어졌고, 대통령 선거를 방불케 할 유세전이 벌어졌다. 그 결과 3년 전에 낙마하였던 후보가 30여년 관록의 통장을 앞섰다. 이상렬 통장(64세)이 당선된 지 반년 정도 지났지만 아직 정비가 되지 않아서인지 약간은 어수선해 보인다.
화지4통 노인회는 진정자 회장(여, 75세)이 맡고 있고, 모이는 인원은 20~30 명선이다. 66세인 유병옥 부녀회장은 15명 정도 회원들과 함께 동네 좋은 일 궂은일에 앞장서는 살림꾼이다. 마을지도자는 박경열 씨인데 화지중앙시장에서 ‘시장반점’을 운영하고 있다. 마을자치회장을 겸하는 이수하 개발위원장은 올해 72세인데, 아직도 건축현장 현역이다. 청년회는 화지산신협 김한성 상무가 맡고 있으며 회원 15명이 마을일에 앞장서고 있다. 마을회관에는 다른 동네에서 보기 힘든 청년회 입간판이 힘찬 직립이다.
화지4통마을회관은 거의 한복판에 있다. 그 앞 개울가에는 논산2호소공원이라는 안내판과 함께 멋들어진 소나무가 서 있고 여름철 모정(정자)이 오가는 동네사람들을 반긴다. 작년 에 완공된 이 소공원은 동네 분위기를 운치있게 해주고 있다. 논산시 공원은 근린공원(주제공원), 어린이공원, 소공원으로 구분되는데, 작년 4월 11일 태어난 여기 2호소공원은 논산 11개 소공원 중 하나이다. 이상렬 통장의 집과 일터는 바로 그 옆이다. 마을회관, 공원, 이장집이 델타 3각 구도이다.
중교천정비사업과 능수버들분수대
화지동32번지로 통칭되던 화지4통 일대는 상전벽해 같은 큰 변화가 없다. 세월 따라 역전쪽 큰 도로변만 가끔씩 바뀌었지, 개울 안쪽으로는 예전 그대로다. 예전 주택이 대부분이고 개울쪽으로는 텃밭들이 농수로에 빨대를 꽂고 있다. 문패 같은 것을 보면 새 도로명보다는 수십 년 되었을 법한 주소푯말들이 고색창연 남아 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뒷강이 그러하다. 지산동의 농수로는 한국산업사쪽으로 해서 진입하는 물이 있고, 조흥로즈빌쪽으로 해서 진입하는 물길이 있다. 이 두 지점은 화지3통 목민교회와 대교4통 현정식당 중간쯤에서 만난다. 우람찬 능수버들 한 그루가 숨은 듯 알박이다. 현재 이 곳은 공사중이고 화지4통쪽으로는 막혀 있다. 중교천은 덕지동에서 시작된 물길이 화지중앙시장을 끼고 돌면서 등화동하수종말처리장으로 해서 빠져나간다. 그러던 물길이 능수버들 삼거리에서 막히자 뒷강물은 역류하여 북행길이다. 물이 거꾸로 가든 말든 강에는 연꽃을 비롯한 수생식물들 지천이고, 그 위로 대신교회 펜스에서 흘러내리는 장미꽃줄기들이 흐드러진 장관이다. 물줄기까지 유턴시키는 대교배수펌프장은 괴력이지만, 길다란 행렬의 철망 펜스는 장미덩이들을 떠받들고 있다.
다시 화지4통 뒷강! 근래 설치된 3~4백 m 데크길은 아직은 찾는 이가 적단다. 이제는 오수관과 폐수관이 구분되지만, 아직도 어딘지 모르게 정비가 덜 된 분위기 탓 같다. 논산시청 ‘맑은물과’ 이름처럼 맑은 물도 흐르지만, 희뿌연한 곳도 공존한다. 능수버들이 있는 부근이 더 그러하다. 이곳에는 현재 분수대를 세우기 위한 기반 공사들이 진행중이다. 화지3통 중앙칼국수가 있는 시장쪽으로는 강밑 물쪽으로 해서 좁다란 산책로가 조성중이다. 서울 청계천에 이어 인근 공주의 제민천이 아기자기한 명소로 떠올랐는데, 논산은 어떤 모습으로 거듭날지 기대반 걱정반이다. 장기로만 느껴지는 중교천 복개공사가 올해 말에는 끝난다 하니, 자연친화적 요소가 얼마나 충족될지 기대를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다문화 인력시장, 세차장, 파발마 렌트카
다시 큰 길쪽으로 나와 본다. 통큰마트 건너편으로 보면 인력시장들이 즐비하다. 얼추 봐도 5개 정도가 눈에 띄는데 농촌인력, 건축 인력의 집결지다. 이 일대는 원룸도 솔찮다. 빌딩형 원룸 1층에 보니 중국지도자 사진들이 걸려 있다. 시장도 다문화요, 인근도 다문화다. 여기는 1인가족도 많고,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집결돼 있는 곳이다.
역전쪽이다 보니 차량 관련 산업도 집결돼 있는 분위기다. 덕지동쪽으로 덕성여객 시내버스주차장이 있고, 그 반대 시내쪽으로 세차장이 서너 곳이다. 큰길가의 만송세차장은 셀프이다. 시내쪽으로 가다보면 좌측에도 하나 있고, 우측으로는 한국산업사 다리쪽으로 신성세차장이 있다. 이 둘의 중간 지점 안쪽으로 해서 개울 옆에 청하세차장이 있다. 이상열 이장이 직영하는 일터이다. 명함에는 손·셀프 세차장이라고 써 있지만 대부분 손세차, 주인에게 맡기고 간다. 1시간쯤 후면 완료되며, 승용차의 경우 내외부 다 청소해주는 데 2~3만원이 시세란다.
역전 주변인 이 동네는 교통량 한적한 시골 분위기지만 주차공간만큼은 여유롭지 않다. 취재를 위해 몇 차례 들렀지만 그때마다 주차가 여의치 않았다. 목적지인 청하세차장 140평 공간은 언제나 만차였다. 처음에는 손님이 맡겨두고 간 차이려니 싶었는데, 세차장은 ‘소카’라는 렌트카 대리점을 겸한단다. 소카는 ‘타다’를 연상하면 되는데 요즘 렌트카는 합리적이다. 무인, 폰으로 예약하고 10만원 입금하면 논산에서 승차, 대전에서 볼일 보고 도착한 곳의 소카 대리점에 두고 가면 거래가 완료되는 시스템이다. 옛날 암행어사가 역에서 파발마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곳에다 말을 넘겨주면 끝나는, 현대판 파발마 같다.
화지동(花枝洞) 딸들과 사람사는 이야기
코로나로 인하여 여러 사람 모이는 게 조심스러워 주로 이상열 통장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가족사가 나왔다. 이 이야기는 “이 동네 출신 중에서 출세한 사람이 있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이대를 나와 사시 패쓰한 윤석희 변호사(55세)라고 답한 다음, 아들이야기부터 풀어놨다. 자동차전기전자과를 나온 아들은 아주렌트카에서 근무중이란다.
요즘은 딸바보라고, 딸들이 더 잘 나 보였다. 논여고에서 1등하던 장녀는 숙명여대 수학통계학과를 나왔다. 우리은행 공채로 들어가 청담동지점에서 근무했는데 중대 나온 남편이 서평택에 이비인후과를 개업하였다고.... 원광대 미대를 나온 작은 딸은 미스전북 선발대회에 나갈 정도로 미인이고 서울 교수집안으로 시집가서....
이통장은 화지동 현재 집이 고향이기도 하지만 원래는 서울 사시던 아버지가 1·4후퇴때 피난 왔다가 주저앉은 곳이 이곳이란다. 그래설까, 자녀들이 서울로 올라간 게 자연스럽다고 보는 모양이다.
이통장 자신은 38년 공무원으로 일했다. 유성농고를 나와 처음에는 고용원으로 들어갔고 후반기에는 기능직(운전원)으로 근무했다. 그 중 보건소에서는 18년 있었고 맨 마지막은 가야곡에서 9년을 근무하다 정년을 한 케이스다. 공무원으로 있다가 퇴직 후 사업을 시작하면 실패확률이 높은데, 그는 가야곡에서부터 하나씩하나씩 준비를 했다.
세차일을 처음에는 사람 쓰고 했는데 일하려는 사람 구하기도 어렵고 하여 직접 몸을 움직인다. 그러다 보니 건강도 한결 나아진다. 렌트카 업무는 시스템으로 움직이니 비교적 안정적이다. 그의 사무실은 동네 사랑방이다. 피아노가 있고 기타가 있어서 여흥을 돋운다. 사랑방에 동네 고스톱은 필수인데 고스톱10계명 같은 것을 붙여놓고 인생타짜로서의 일침도 가하고 있다.
지척지간에 <여기는 회장님 전용 주차장입니다>는 안내문구가 붙어 있다. 어디 콜라텍을 가니 문구가 재밌어서 그대로 써놓았단다. “인생 별거 있나요, 서로 웃으며 재미지게 살면 되지요.” 이렇게 말하는 이통장은 그러나 공적인 면에서는 엄격함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우리 동네로 이사 오는 사람도 적고 애기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인구가 절반쯤 줄었나 봐요. 이제 내가 자청하여 통장 선거에 나갔고 원하던 직책을 맡게 됐으니 동네 구석구석 좀더 살펴보려구요. 눈에 띄는 게 신경 쓰이니까 우선은 깨끗하게 정화하는 일부터 함께 해가면서 동네 분 한분한분 이야기를 들어보려 합니다. 마을일은, 고인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처럼 공개가 돼야 맑고 투명해질 수 있다고 봐요.”
- 이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