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인생박물관] 왕대리 여장부 김홍순 마을회장
모든 어려움과 시련은 물렀거라!
계룡시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나오자마자 마주치는 마을이 왕대리다. 이 마을에는 조선시대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의 묘역(충남 지정문화재 308호)과 재실인 모원재(慕遠齋)가 있다. 광산 김씨의 자부심을 갖고 있는 유서 깊고 보수적인 마을이다. 이런 마을에 여성이 마을 노인회장을 맡고 있다니 다소 의외다. 여장부인 김홍순(金弘順, 74세) 회장을 만나 그의 삶과 꿈을 들어본다.
시집 진산에서 친정 왕대리로 이사 감행
김홍순 회장은 대전시 문화동에서 8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부모님이 그곳에서 농을 짜는 가구공장을 운영했단다. 그러던 것이 일제 강점기가 끝나며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도망가면서 불을 질러 그만 모두다 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 닥친 6·25동란 때 피란 온 곳이 바로 지금의 계룡 왕대리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7살이었다. 그리고 왕대리를 고향 삼아 살았다. 장녀로서 집안 살림에 보태느라 그녀는 대전 원성동에 있는 소창과 방충망 만드는 공장에 다녔다. 교통이 불편할 때이기도 했지만, 차비를 아끼느라 걸어서 다녔단다. 10년 동안 그 공장을 다녔다고 하니 어린 나이부터 다녔으리라.
그녀는 그 공장에 함께 다니던 친척 아줌마 중매로 1971년 24세때 결혼을 했다. 그리고 시댁이 있는 금산군 진산면에서 살았다. 시집은 농사짓는 집이었는데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남편(김갑수金甲水, 80세)은 6남매 중 장남이었다. 시부모와 시동생들, 그리고 육촌 시동생까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먹고살기 힘든 나날이었고, 무엇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빚만 느는 살림에 앞이 캄캄하여 그녀는 ‘친정 동네에 가서 살자’ 얘기하여 1980년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그러니 금산에서의 시집생활 9년을 빼고 나면 그녀는 계룡 왕대리에서 평생 살았으니 이곳이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부·자 실명에 눈이 깜깜해졌지만
고향이라고 돌아왔지만 그 가난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친정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녀는 처음 이곳에 이사를 와서 다섯 번이나 집을 옮겨 다녀야만 했다. 몇 집 되지도 않는 작을 시골마을에서 그리 많이 이사를 했다는 것을 보면, 그녀 가정 형편이 어떠했으리라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녀는 2남2녀 4남매를 두었다. 큰딸이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도시락 반찬으로 그 흔한 계란부침이며 어묵볶음 같은 것 한번 싸주지 못했다. 또 자식들에게 사과나 귤과 같은 과일을 사 먹인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지금껏 가슴에 맺힌 것은, 바로 자식을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한 것이라고 그녀는 한탄한다.
“한창 클 때 자식들 제대로 먹이지 못한 게 가슴에 항상 한으로 맺혀 있지요. 부모 잘못 만나 함께 고생한 거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져요.”
그녀에게 힘든 것은 가난뿐만이 아니었다. 남편이 30대 중반이었을 때 논에 일하러 나갔다가 그만 벌에 눈을 쏘여 실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시련이 채 아물기도 전, 또 그 이듬해에는 큰아들이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한 아이가 볼펜심으로 활을 쏘았는데 그것이 눈에 맞아 역시 실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녀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그 눈을 고쳐보려 대전으로, 서울로 용하다는 큰 병원을 백방 찾아다녔지만 “못 고친다”는, 한결같은 답변만 들었을 뿐이다. 어린 아들의 눈이 안 보인다니 그녀의 눈앞이 캄캄해지며 몇 번씩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와중에도 남편과 그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동네 이집저집 품을 팔아 살았다. 그리고 땅을 빌려 하우스를 짓고 딸기, 토마토, 상추, 쑥갓 등의 농사를 지었다. 그렇게 고생을 하며 억척스럽게 일을 하여 50줄에 들어서자 살만해지더란다. 그래서 연산면에 논도 조금 장만하여 내 땅에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지금은 그것을 팔아 대전에 조그만 상가건물을 사서 임대 놓아 그 수입으로 살아간다.
가시밭길, 신앙과 봉사로 헤쳐오다
김홍순 회장은 한 마을에 있는 왕대리교회에 나가며 45년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녀의 삶에서 신앙은 힘이자 희망이고 안식처이다. 그리 넉넉지 않은 생활임에도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나누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들어서, 나름 실천해왔단다.
그녀의 가족은 남편을 빼고는 모두 신앙생활을 함께 하고 있다. 남편만큼은 아무리 전도를 해도 안 되더란다. “말도 말아요. 저이가 내 성경가방을 세 번이나 아궁이 불속에 집어던졌어요. 지금은, 본인은 안 나가지만 식구들이 교회 다니는 것에 대해 아무 말 하지 않아요.”
필자가 ‘왜 아궁이 속에 성경가방을 던졌느냐’고 할아버지께 여쭈어보자, 그는 답한다. “그때는 그냥 교회 다니는 꼴이 보기 싫어서 그랬는가, 부아가 나서 그랬는가,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이어서 “그래도 집안이 이리 편안해지고 살만해진 것이, 교회 나간 덕분이지 싶기도 하다”고 할아버지는 알쏭달쏭이다.
그녀는 신앙생활과 함께 마을일에도 앞장섰다. 일을 앞에 두고서는, 뒤로 빼는 성격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20년 전에는 부녀회장도 5년간 했는데, 그때는 부녀회에서 밭농사 논농사도 많이 지어 그것으로 불우이웃돕기도 했다. 배추 1000포기로 김장을 해서 두마면 일대의 불우이웃들에게 나누어준 적도 있다.
그녀는 2018년도에 왕대2리 노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아무래도 어르신들이 많은 시골마을이라 동네 어른들 섬기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회장의 맡은 바 일을 나름 성실하게 해보고 있다고, 그녀는 밝힌다.
요새 걱정되는 게 생겼다. 연산과 대전을 잇는 신도로가 마을 앞으로 난다고 해서 혹시나 공해와 소음으로 마을에 피해가 있지 않을까, 그것이 신경 바짝 쓰인단다. 가뜩이나 공단이 가까운데 생기면서 마을 어른들이 공해 걱정을 많이 하고 있는데 도로까지 난다고 하니 더욱 그럴밖에.
김홍순 마을회장은 “이렇게 나이 들어 먹고 살만해진 것이 복이라면 복”이라고, “이런 작은 복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뿌듯해한다. 다만 몇 년 전부터 건강이 안 좋아져 여기저기 아픈데, 아직 손주들 봐주어야 하는 처지라 제발 아프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라며 말을 마쳤다. 그녀는 마을회장으로, 대가족의 어머니로, 손주들을 키우는 주부로 하루하루 정말 열심히, 씩씩하게,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